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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트 에코 <추의 역사>를 읽으며 생각해 본 은유의 역할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10. 2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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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의 역사>를 읽어나가는 중입니다. 오늘은 ‘은유’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지금이야 성경이 세계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지만, 성경 번역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전, 게다가 문맹률이 높던 시절에는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성경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성경의 이야기를 이미지로 옮기는 삽화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서양미술사를 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 언어와 은유


그런데 묵시록(계시록)의 내용을 표현한 작품들은 그 자체로 성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즉, 성경의 이야기를 재현한 하나의 ’은유‘ 혹은 ‘표식’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음 그림을 보고 또 해당 성경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묵시록 태피스트리 (출처: 추의 역사)



(요한계시록 13장 / 개역개정)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위의 삽화는 성경 이야기의 단면만을 드러냅니다. 그림 속에는 용이 신성모독을 한다거나,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는다거나,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는 등의 이야기가 (어떤 상징으로는 나타날 수 있어도)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머리가 일곱 개 뿔이 열 개 달린 짐승이 실제로 저렇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고요.



문자 언어와 은유


그렇다면 문자로 풀이된 것은 어떤 실체(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명백백히 명시적으로 다 전달할까요? 그렇지 않겠죠. 이를테면 마흔두 달이 말그대로 3년 6개월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분명한 끝이 있는, ‘한정된 기간’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림 언어, 문자 혹은 음성 언어 등 우리의 감각과 인식 체계를 세상과 연결해주는 도구는 그 자체로 이 세상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표현해줄 수 없습니다. ‘나무’라는 말 자체가 나무인 것은 아니고, 나무라는 실체를 지칭하는 ’표식‘인 것처럼요. ‘존중’, ’신뢰‘와 같은 추상적 개념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지요.



은유의 역할

한편 이 복잡하고 신비한 세상[그리고 타인]을 조금씩 이해하고 알아가도록 도와주는 은유는, 우리들의 사고 체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사건이 어떤 사람의 성품이나 삶의 방식 전반에 대한 은유로 작용할 수도 있어서, 말이나, 글이나, 행동에 더욱 책임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 글은, 글 잘 쓰고 엄청 멋진 생각들을 하고 싶은데 생각도 지식도 짧고 얄팍한 제 수준에 대한 은유인 것 같아 적잖이 부끄럽네요. ^^;;



평안하고 기쁜 밤과 새날 맞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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