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마른 코 들이마시기와 동조하기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12. 1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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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감독을 하는데,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학기에도 이 학급에 시감을 들어왔다가 한 시간 내내 초긴장 상태였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콧물이 흐르는 상태가 아닌 듯하니 일부러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거나, 혹은 휴지가 필요하냐며 물으러 다니느라(휴지까지 줬으니 소리내지 말라고 당부하느라) 참으로 분주했습니다. 1열 쪽으로 단속하러 가면 4열에서 소리가 나고, 그러면 5열에서 메아리가 울리듯 훌쩍이고, 4, 5열 사이로 오면 이번에는 1열에서 다시 소리가 나고, 4열에 앉은 친구는 제가 옆에 있는데도 일부러 훌쩍, 소리를 한 번 더 내는가 싶더니 3열 끝의 친구도 가세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잖아요, 왜. 사춘기 시절을 지나온 사람으로서 이해는 합니다.
용납이 안될 뿐.
 
재미 있는(이라기보다 정말 화가 나는) 점은, 가장 노골적으로, 그리고 크게 콧소리를 내는 한 명의 학생이 있고, 나머지 대여섯 명의 학생들은 엄마 오리를 졸졸졸 따라가는 아기 오리들처럼, 혹은 여왕벌을 호위하는 일벌 무리처럼 마른 코를 성실하고 꾸준하게 들이마셔 지원 사격을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인식의 틀에서는 우정, 의리 혹은 재미라는 단어로 표현될 것 같았습니다.
 
오늘도 그러더라고요. 너무 동시다발적이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어서, 실제 이러한 소리를 이용한 부정행위가 일어날 확률은 매우 낮아 보였습니다. 다만 훌쩍이기 대작전에 가담한 학생이든 가담하지 않는 학생이든, 집중해서 문제를 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지난번에는 고사 종료 후 대장 오리가 '비염'이 있다는 사실을 면담을 통해 확인했으니, 오늘은 아기 오리들을(지금이야 친근한 용어로 부르지만 당시 저의 눈빛은 굉장히 살벌했습니다. 불안했거든요.) 공략(?)했습니다. 저의 단계별 작전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단계: 5~10초에 한 번씩 훌쩍이는 소리를 내는 학생들 곁에 다가가 '지난번에도 이 소리 냈었어. 소리 일부러 내지 마라.'라고 귀엣말로 경고하기
2단계: 그래도 계속해서 소리내는 학생들 옆에 서 있기
3단계: 그래도 계속해서 소리내는 학생의 답안지를 확인하여 이름을 메모하기
4단계: 그래도 계속해서 소리내는 아이들에게 '00아, 동조하는 건 아주 나쁜 거야. 시험 분위기 방해하지 말아줘. 부탁한다.'라고 적은 휴대폰 메모장 화면 보여주며 호소하기
 
 
이름을 적기 시작하는 순간 학생은 확실히 긴장하는 기미가 보였고, 두어 명의 학생에게 호소문까지 보여주고 나자 전반적으로 훌쩍이는 소리의 빈도와 데시벨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이 때 무슨 일이 일어났게요? 제가 큰 깨달음을 얻은 지점이기도 합니다.
 
대장 오리 학생이, 온 교실에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게 하던 코 들이마시는 소리를 별안간 멈추는 것이 아닌가요! (물론 5분 정도 있다가 한층 작은 소리로 다시 시작하긴 했습니다.)
 
 
 
저의 깨달음은, 동조자가 없으면, 주동자는 동력을 (일정 혹은 상당 부분, 혹은 아주) 상실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람직하지 못한[일상 속의 비윤리적 행위로부터 범법 행위에 이르기까지] 행동 이면에는 이에 가담하거나 동조하거나 혹은 이를 용인하는 무리, 즉 '마주치는 손바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시험이 무탈하게 종료된 후에, 학생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고사 때부터 제가 관찰한 이상한 점은, 0학년 0반에는 마른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를 계속해서 내는 여학생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일에 동조하는 것은 정말 나쁜 일입니다. 여러분이 바른 선택을 해나가는 사람으로 잘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고사 시간에도 훌쩍이는 학생들은 있었습니다. 다만 아까처럼 노골적이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지 않았고, 저는 아까 학급에서의 상황이 더욱 정리가 되었지요... (요녀석들 정말!)  한편 모든 시험이 끝난 후 길거리에서 만난 여학생들 무리가 "선생님, 저희 반 애들이 시험 전부터 수업시간에도 그러긴 했는데 저희는 아무렇지 않아요~" 하며 두둔해주는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형성된 세력[혹은 문화]의 힘에 대해 더욱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좀 무겁네요.
 
우리 삶의 가장 사소한 일들부터 대한민국의 현 시국까지 동조 행위의 위험성에 대한 저의 추론 및 결론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온갖 어두움이 빛으로 밝혀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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