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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섬뜩한 눈이 내린다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12. 2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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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내리는 눈은 소리 없이 사각사각 내려와 소복소복 싸이며 강아지와 어린이들이 뛰놀게 만드는 눈이 아닙니다. 다음은 '폭설' 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눈에 대한 묘사들입니다. 
 
 
 
(59) 흰 새들의 길고 찬란한 띠
(60) 눈이란 원래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지상에서부터 끝없이 생겨나 허공으로 빨려 올라가는
(63) 잿빛 하늘과 아스팔트 사이의 허공을 촘촘히 꿰매는 무수한 흰 실들
(67) 수천수만의 새떼같은 눈송이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나 바다 위를 쓸려 다니다 빛과 함께 홀연히 사라진다.
(71) 숨막히는 밀도의 저 눈보라
(71) 어디까지 구름이고 안개이고 눈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일렁이는 회백색 덩어리
(74) 허공 위로 고운 소금 가루 같은 눈발이 반짝였다.
(87) 버스 앞유리의 와이퍼가 끈질기게 움직이고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달려드는 눈보라를 지워내지 못한다.
 
손가락 절단 사건으로 수술을 받은 인선의 모습을 본 직후여서 그럴까요, 눈은 허공을 촘촘히 꿰매는 실들처럼 보이기도 하는군요. 아주 많은 새들이 하늘을 메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맹렬한 폭설이, 인선의 부탁을 받아 인선의 제주 집으로 향하는 경하를 아주 삼켜버릴 것만 같습니다.
 
 
 


 
 
 
(81) 내 뺨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를 않더래.
 
엄마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가출했다가 다쳐 입원한 인선을 찾아온 엄마가, 인선의 소재를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하게 되었던 예지몽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인선의 얼굴에 떨어진 눈이 녹지를 않아서, 엄마는 인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하네요. 무슨 영문으로 눈이 녹지 않았다고 하여 두려움에 떠는 것일까요? 조금 더 읽다 보면 이유가 나옵니다.
 
 
(83) 우리는 따뜻한 얼굴을 가졌으므로 그 눈송이들은 곧 녹았고, 그 젖은 자리 위로 다시 새로운 눈송이가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일반적으로 살갗에 닿은 눈은 체온으로 인해 녹아버리는데, 눈이 녹지 않았다면, 그것은 체온이 식어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정말 그렇네요.
 
 
(84)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86) 그추룩 얼굴에 눈이 히영하게 묻엉으네......
 
제주 4.3 사건이 인선의 어머니에게 남긴 트라우마입니다. 심부름을 가있느라고 학살을 면한 인선의 어머니와 언니가 마을에 돌아와서, 쌓여있는 시체에 쌓인 녹지 않은 눈을 걷어내며 가족을 찾던,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었던 그 날의 기억이, 어머니의 꿈에 나타나고 또 나타나 영혼을 갈기갈기 헤집어 놓았는가 봅니다.
 
 
 

 
 
 
 
(89) 허공을 가득 메운 눈송이들 사이로 선홍색 신호등이 켜진다. 버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다.
 
선홍색은 신호등의 색깔이기도 하지만, 핏빛이기도 합니다. 인선을 통해 인선의 어머니가 겪은 일을 듣고, 인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제주를 찾은 경하도, 선홍색으로 물든 눈송이를 바라보며 이제는 모두의 소유가 되어버린 끔찍한 기억을 연상합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섬뜩한 눈이 내립니다.

우리들의 창밖의 눈도 섬뜩해집니다.
 
한강 작가의 문장들이 하나 하나 선득한 한기를 품은 눈송이의 모습으로 내려와,
 
애수가 됩니다.
 
마음의 온기를 만나면요.
마음의 온기가 남아있다면요.

혹은 다시금 생겨나 번진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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