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갈등을 봉합합시다 #3 -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늘 서점에서 겪은 일입니다.
[H0-5] 벽면이 어디있나, 아 저기. 이쪽에서 도서를 찾아보는 건 처음이네. 고립의 시대, 고립의 시대, 고립의,... 쪼그려 앉아 책을 찾고 있을 때였습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허공에 발길질을 세 차례 하더니 무어라 무어라 분노에 차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느낌이 예사롭지 않아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는 않고, 마침내 찾은 책에 시선을 고정하려는데 쉽지 않더군요. 몸을 돌리며 잠시 바라 보니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복면을 한 차림의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다이어리에 페이지를 메모해가며 책을 발췌독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청년의 말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게 아니겠어요?
지금 책 사진 찍은 거예요? 책 사진 찍으면 안 된다잖아요. 어디 방금 찍은 거 보여줘 봐요.
내가 트럼프 지지자라고...
책 사진을 찍은 것은 잘못이나, 갑자기 공격을 당한 다른 청년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금세 자리를 뜨더군요.
남겨진 청년은 우두커니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우연의 일치인지, 다른 청년의 무리가 지나가면서 "모자 쓰니까 범죄자 같지 않냐."하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지나갔습니다.
청년은 무리가 지나간 후에도 잠시 가만히 있더니, 이윽고 모자에 대한 혼잣말을 시작하였습니다.
남이사 모자를 쓰던 말던, 그쵸.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더러 아이가 토스트를 사달라고 조르는 통에 저는 그저 책을 급히 결제하고 나왔고요.
고립의 시대
토스트를 먹은 후, 커피숍에 앉아 아까 구입한 노리나 허츠의 책 <고립의 시대>를 읽었습니다.
초연결 및 초개인화 시대에 모두가 연결이 되어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공동체성은 점차 약화되고 관계가 단절되며, 개인이 점차 고립되는 현상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룬 책이더군요. 발췌독을 하고 넘길 책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적 고립과 정치적 극단주의
노리나 허츠는 책에서 외로움의 문제가 정신적,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치적 극단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논증하며 다음과 같이 아렌트를 인용합니다.
나치즘을 추종한 사람들의 "주요 특성은 (중략) 야만과 퇴보가 아닌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임을 발견한 아렌트는 "사회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개인적 자아를 투항함으로써 목적의식과 자긍심을 되찾으려 한다"고 주장한다.
- 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69면
책 표지의 띠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사회적 고립의 문제가 양극화와 정치적 극단주의와 같은 사회 문제를 양산한다는 것입니다.
서점의 그 청년이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일전에 집회에 다녀오는 길에 저를 향해 "빨갱이를 사형하라."라고 말하던 청년도 떠오르고요. 책을 읽으니 청년들의 외로움이 보였습니다. (이러한 청년들의 외로움을, 누군가는 이용하고 있겠지요...)
뉴스 대신 유튜브를 보는 사람들
서로 소통이 단절되는 예는 더 많이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뉴스는 신뢰할 수가 없어 유튜브만 보고, 그나마 외신은 공정한 편이어서 신뢰할 수 있다고 합니다. (특정 정치적 성향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요.)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도움(?)으로 자신의 입맛과 성향에 맞는 정보만 접하며 나의 의견과 다른 어떤 말도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https://v.daum.net/v/20250115050033199
그뭔씹
게다가 요새 젊은이들은 본인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시작하면 "그뭔씹"이라고 말하며 일축해 버린다고 합니다.
어감이 다소 불편한 음절이 포함되어 놀라신 분들도 계시지요?
요새 십대 사이의 유행어라고 하네요. "그게 뭔데 씹덕아"를 줄인 말이라고 합니다. 씹덕은 특정 대상에 대해 '집착적 관심'을 갖는 일본어인 '오타쿠'에서 파생된 단어로, 오타쿠보다 한층 심화된 집착적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지칭하는 은어인 '십덕후'에 된소리를 넣어 한층 더 경멸적인 어조를 담은 줄임말이라네요. 성평등, 사회 정의, 공감적 이해, 소통 등 자신이 관심 없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시작하면 바로 "그뭔씹"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소통이 안 되니 이해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자연히 점점 서로가 서로를 고립시킬 수밖에 없겠네요.
여러분, 이를 어쩌지요? 딱한 우리 청년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단절된 관계들을 회복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말을 걸어 공동체 안으로, 안으로 부를 수 있을까요?
한국 사회의 통합을 위해, 우리는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이 떠오릅니다.
심히 안타까워 기도하는 밤입니다.
청년에게 따스한 말을 건네지 않고 온 게 못내 후회됩니다.
따스하게 말을 거는 사회를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