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전주곡 Op.23 No.4 선율이 귓가에, 머리 속에 맴도는 채로 움베르트 에코 <추의 역사>를 일회독했다. 정독한 구간도, 흘려읽기와 발췌독을 겸한 구간도, 그림만 눈으로 훑은 구간도 있지만 그래도 옮긴이의 말이 나오기까지 책장을 한 장씩 모두 넘기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림체와 인간의 마음
신기했던 점은 처음 접하는 작품일지라도 그림체만 보고 살바도르 달리인지, 구스타프 클림트인지, 오딜롱 르동인지, 에곤 쉴레인지 알 것 같더라는 점이다. 가랑비에 옷이 조금 젖었는가 보다.
또한 읽으면서 깨달은 점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 그림과 말과 행동이 되어 밖으로 표출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탐욕이 가득한 마음에서는 이기적이고 잔혹한 말과 행동이 나오는가 하면, 그리스도를 품은 마음에서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묻어나온다. (분명 때가 타고 닳고 닳은 마음에 마침내 그리스도가 깃든 것이리라.) 또한 느낀 점은, 인간의 마음은 정녕 우주처럼 복잡하다는 점이다. <다시 책으로>에서 매리언 울프가 인용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옮겨 본다.
뇌는―하늘보다 넓습니다―
왜냐면―둘을 나란히 두면―
뇌는 하늘을 담을 테니까요
그것도 쉽사리―게다가 당신마저―담을 겁니다
뇌는 바다보다 깊습니다―
왜냐면 한데 두면―푸름에서 푸름으로
뇌는 바다를 빨아들일 테니까요―
물통 속의―스펀지가―그러듯이―
뇌는 신神만큼이나 무게가 나갑니다―
왜냐면―둘을 들어 올려보세요―나란히―
그러면 차이는 날 겁니다―그렇다 해도―
음절과 음성의 차이일 뿐이지요
- 에밀리 디킨슨
어찌 이런 복잡하고 광활한 우주와 같은 존재들을 창조하신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움에 경외감을 느낀다. 세상만사가 싫어진 시기를 보내고 있는 듯한 아이도, 나처럼 감사의 기도를 회복하게 되기를, 온갖 응어리들이 기도로 글로 노래로 태어나게 되기를 기도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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