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인간 자신의 생식보다 더 추하고 더 불쾌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시커먼 피, 더러운 씨, 불길한 월경, 악취 나는 정액의 혐오스러운 혼합은 몹시도 역겨운 것이 될 것이다. ... 그럼에도 이것들은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하며, 모든 좋은 것들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추함이란 좋은 것이 아닌가?
- 안토니오 로코 <추에 관하여> 재인용 (움베르트 에코 <추의 역사> 149면)
당황스러우면서도 반박할 수 없는 서술입니다. 생리적 욕구를 통해 생명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께서 왜 이런 (때때로) 추잡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인생의 밑바탕에 설계해놓은 것일까, 하는 것은 답을 얻을 수 없는 근원적 질문이지요. 안토니오 로코는 감미롭고 예쁜 것이 곧 역겨운 것이고 역겨운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통찰 끝에 추함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하네요.
한편 디오니시우스는 <천계 위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신의 본성은 인간의 어떤 은유로도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신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이 아닌 것을 말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즉 죄악과 타락, 추함을 통해, 이러한 모습이 '아닌' 존재로서의 절대선이며 완전무결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상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죠. 창조주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될 것 같습니다.
신은 000이다. (인간의 사고의 틀로 확인할 수 없는 명제)
XXX는 신의 속성이 아니다.
XXX가 아닌 완전무결한 것이 신적 속성이다.
(이런 논증을 귀추법이라고 하나요?)
그런데 자연의 추함이 곧 아름다움과 연결되므로 '추함'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논하겠다는 안토니오 로코의 주장에 마음이 다소 무거운 이유를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신약성경 중 로마서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 로마서 5:20下~6:1
큰 죄를 사함 받는 은혜를 누리기 위해 무분별하게 죄 짓는 것을 경계하라고 바울은 경고합니다. 욕망에 대한 사유가 역설적으로 신의 속성에 대한 유추를 돕는다 하더라도, 외설스럽고 인간의 근본적 욕망 그리고 타락에 대해 골몰하고 탐닉하는 것이 '절대선을 지향'하는 마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미세먼지가 심한 나날이 지속될 때 맑은 공기의 고마움을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다고 해서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 미세먼지를 의도적으로 일으키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안그래도 늘 뒷마무리가 어려운데 오늘 글은 더더욱 결론을 내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척
선한 척
죄 없는 척
...이 아닌 정말 선을 추구하고 죄를 멀리하는 아름다움에 가까워지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하는 마음의 질문만 남겨 봅니다.
복되고 평안한 밤과 새날 맞이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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