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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독서 일기 #2 - 말하지 않음의 아름다움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10. 28.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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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25)
 
소녀에게는 말이 어렵고 무겁습니다. 킨셀라 부부의 집에 맡겨지던 날, 소녀는 낯선 환경을 묘사할 적당한 말들을 떠올리려 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내향적인 성향을 타고났을 수도 있고, 말을 해봤자 받아들여지지 않아 입을 다무는 습관이 생겼을 수도 있고, 아버지의 쉽고 가볍고 아픈 말들로 인해 말이 싫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킨셀라 아저씨는 이런 소녀의 성향을 두고, 해야 하는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하는 아이라고 타인에게 말하며, 이런 애들이 많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한편 새로운 환경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이불에 실수를 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많아봤자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말에 대한 아주 깊은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28)
 
킨셀라 아주머니와 함께 양동이를 들고 우물에 물 길으러 가는 동안 소녀는 행복한 적막감을 느낍니다. 갑작스런 발레수업 휴강으로 인해 저녁 산책을 즐길 때 저는 딱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낙엽을 한 꺼풀 두 꺼풀 떨어내고 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얀 구름과 밤하늘이 얼마나 멋지던지요. 눈과 귀, 그리고 바람을 느낄 피부로 충분한, 말은 필요하지 않은 공간이었습니다.
 
 

나뭇가지 사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보느라
어깨결림 증상이 사라지는 유익도 누렸습니다

 
 
 
소녀도 풀숲 사이를 헤치며 발자국 소리, 진흙을 밟는 느낌, 풀벌레 소리와 나비의 날갯짓에 온 감각을 집중하며 깊은 행복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순간, 소녀는 도무지 행복하지 않아 말을 않던 순간들도 떠올리네요. 지나간 순간들, 그리고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순간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행복이 감격스럽다 못해 두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한 시간들이 지나고 귀가를 하루 앞둔  날, 소녀는 아주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가 봅니다. 따뜻한 차를 끓이실 수 있도록 양동이를 들고 혼자 우물물을 긷다가 그만 우물에 빠져 감기에 걸리고 마네요. 어쩌다가 그랬는지 재차 물으며 대답을 종용하는 엄마에게 소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한 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96)
 
어쩌다가 우물에 빠져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는지, 킨셀라 아주머니가 혹은 아저씨가 소녀 혼자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도록 시킨 것인지, 어째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사서 하느라 이 꼴이 되어버렸는지 끊임없이 쏟아지는 말들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던가 봅니다. 심지어 이 대화를 옆에서 듣던 아빠가 킨셀라 부부가 진흙 구덩이에서 자식을 잃은 것도 당연하다는 식의 폭언을 쏟아내는 것만은 정말 참을 수 없었을 것 같고요.
 
 
 
 
 
 
 
그나저나 높이높이 뻗어나가겠다고 팔을 쭉 뻗어 벚나무 가지에 척~ 걸쳐놓은 욕심꾸러기 작은 나무 좀 보세요. 하나님의 농담에 저는 마음 속으로 크게 웃으며 산책을 마쳤답니다. 벚나무 너무 괴롭히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거라, 타일러주고 싶더라고요.
 

 
 
 
 
 
 
 
내일은 말 없이 따뜻한 눈빛으로 저마다 힘겨운 사춘기를 보내고 있을 학생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침묵의 기도가 폭신하고 따뜻한 이불처럼 우리 영혼을 감싸주기를 소망합니다.
 
 
 
귀한 밤과 복된 새날 맞이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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