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파우스트> 독서일기 - 시인에 빙의한 괴테

글을써보려는사람 2025. 6. 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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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완독을 40페이지 정도 남겨 둔 상태에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시대를 초월하여 칭송받는 대작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읽으면서 표시해 두었던 부분을 몇 구절 필사하기 시작하다가, 그것도 충분치 않게 느껴져서 1부 첫 페이지로 돌아왔습니다.
 
예전 같으면 책의 100쪽가량을 간신히 읽고 다른 책을 펼쳐 들기를 반복하던 저이기에, 447면에서 9면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겠습니다. 하지만 그간 제법 독서 훈련이 되었는지 이렇게 돌아와도 분명히, 그것도 더 기쁜 마음으로 완독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독서에 대한 효능감이 제법 생긴 상태인 듯하여 기쁜 마음에 사설이 길었습니다.
 
 

 
 
저는 또 한 가지의 이유로 기쁜데요, (그래도) 큰맘 먹고 돌아온 첫 장면에서 괴테의 목소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첫 장면인 <무대에서의 서막>에는 단장, 전속 시인, 그리고 어릿광대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괴테는 시인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시인의 목적은 작품을 통한 영속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인데, 흥행에 목적이 있는 단장과 어릿광대는 도통 숭고한 뜻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인의 말을 자르며 여러 조언을 늘어놓습니다. 다음 대사를 보시죠.
 

이성과 오성과 감정과 정열, 다 좋지요. 그러나 익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11면, 어릿광대의 대사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보도록 눈앞에 많은 사건을 잔뜩 펼쳐 주면, (중략) 대중은 대량으로 대하는 수밖에 없네. 그러면 결국 저마다 좋아하는 뭔가를 찾아내게 마련일세. (중략) 그런 잡탕이면 훌륭하게 해낼 걸세. 
- 같은면, 단장의 대사

 
어릿광대는 재미가 없으면 흥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훈수를 두고, 단장은 작품의 완성도 같은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을 볼거리를 많이 제공하라고 훈수를 둡니다. 두 인물은 각각 괴테에게 희곡을 의뢰하는 사람과 연극배우를 가리킬 수도 있고, 평론가, 독자,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대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장과 어릿광대와 같은 사람들은 '기쁨을 추구할 줄 모른다'라고 단정지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다음 구절을 보시죠.
 

그리고 누구를 상대로 글을 쓰는가 잘 보란 말일세! ... 그리고 제일 곤란한 것은 신문, 잡지를 읽다가 싫증이 나서 오는 손님이네.
- 12면, 단장의 대사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명백히 기쁨인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고루한 글만 읽다가 무언가 신선하고 놀라운 것을 바라보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붙들며 기뻐하고 싶어서 분투하는 괴테는, 분명 사람들의 눈에 희한하게 보일 것 같지요?
그러고 보니 기쁨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른가 봅니다. 
 
괴테에게 기쁨은 아름답고 참된 사유를 통해 후세까지 이어질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이고, 사람들의 기쁨은 쾌락 혹은 유흥의 개념에 가까워 보입니다. 단장과 어릿광대는 가벼움을 추구하는 반면, 시인은 무거움을 고민합니다. 
 
하지만 '역시 괴테가 옳아.'라는 결론을 고민없이 내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유희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존재하기나 하던가요!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 보다, 괴테는 우리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며 눈 앞에 놓인 덧없는 기쁨을 추구하느라 영속적 가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니, 네가 이 책을 읽으며 얻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기쁨이니, 하고 말이지요. 후세의 독자인 저와 저의 독자인 여러분이 함께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었으니, 시인에 빙의한 괴테의 작전은 가히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어릿광대처럼 김을 팍 새게 만드는 말을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힘을 사용해서 시인 장사를 잘 해보십시오,
- 14면 어릿광대의 대사

 
 
시의 아름다움을 기껏 읊었더니, 그러면 가서 '시인 장사'나 잘 해보라는 말이 돌아옵니다. 참 허무할 것 같지요.
 
사람들의 모함에도 일절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께 '진리가 무엇이냐(진리가 밥 먹여주냐)'라고 물은 빌라도의 표정도 떠올려 보게 되네요.
 
 
너무 가볍고 단편적인 재미에 골몰한 상태는 아닌지, 반대로 너무 진지하게 몰두하느라 웃어넘길 여유를 잃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의 글을 맺습니다.
 
조화와 균형이 중요할 테니까요.
 
복된 밤과 새날 맞이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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