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3교시 1학년 0반에서 수업을 폭망 했습니다.
에세이를 쓰는 수행평가를 하기에 앞서 미세차별의 개념을 학습하는 중인데요, 고1 학습자들이 배우기에는 어려운 어휘도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고, 내용도 생소하고 복잡해서 아이들이 너무 버거웠나 봐요.
'이런 거 왜 배워요? 미세차별은 사람마다 다 기준도 다른 거라면서요.'
한 아이가 입을 떼자 우르르르르르르 불만의 소리가 몰려들어 순식간에 교실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죠.
그리고 저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 태도가 이런 거니?'
게임 끝. 그다음은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잔상이 오후 내내 뇌리에 남는 아이들의 표정을, 말실수의 대가로 선물 받았습니다.
게다가 이번 주간은 수업 공개 주간이어서, 저보다 훨씬 연배가 낮으신 선생님께서 오늘 0반 수업을 참관하러 오시기로 했거든요. 심지어 수업을 망한 직후인 4교시에 해당 선생님의 수업을 참관했는데, OMG, 너무너무 훌륭하고 매끄럽게 수업을 이어가시는 거예요. 말도 못 하게 불안하고 초조했죠--근데 저도 좀 변명이 있긴 해요. 잠이 극도로 부족한 상태였고, 이명현상에다가 개인적인 일도 있어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교사도 인간이잖아요--다행인지 불행인지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는 아니었어요. 부족한 잠 덕분에 너무 피곤해서 초저녁부터 사족을 못 쓰고 잤으니까요.
오늘 수업 어땠게요?
또 망했으면 포스팅 못 했겠죠^^;;
다행히 성공적이었어요. 아이들 마음을 다시 얻었거든요.
제가 어제 수업 후에 엄청 반성을 했어요.
라는 말로 수업을 시작했어요.
"이렇게 어려운 내용을 심지어 재미없게 가르쳐놓고 여러분의 태도를 탓했으니. 저는 어제 내내 고민했습니다. 이런 걸 학생들에게 왜 배우게 해야 하나, 하고요."
아이들이 눈을 들어 저를 쳐다봤죠. 이건 좋은 시작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00의 말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말.“
운을 띄워놓고, 약간은 다른 이야기를 곁들였죠.
그리고 저는, 여러분 자살하지 않도록 이런 수업을 합니다.
아이들의 의아해하는 눈동자를 보셨어야 해요. 저는 말을 이어갔어요.
"내 친구가 미세차별이라고 느끼는 기준이 나와는 다를 수 있으니까, 미세차별 하는 사람 되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자는 거예요. 우리는 말 한마디에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잖아요. 자살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 되지 말자고, 그래서 이런 수업 해요."
아이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리고 기본에 충실했습니다. 1)수업을 들어가기 전에 지난 차시를 복습하기, 2)교사가 강의하기 전에 본인이 이해한 내용을 짝꿍 및 모둠원과 이야기 나눠보기, 3)모둠끼리 상호작용하도록 할 때 새끼손가락이 가장 긴 사람이 먼저 설명하기와 같은 재미[예측불가능성]의 요소를 첨가하기, 4)강의를 한 세션 한 다음에 바로 다음 세션 강의를 이어갈지, 아니면 방금 들은 내용을 소화시킬 시간을 1분가량 부여할지 학생에게 의견 물어보기 등.
아주 만족스럽게 수업을 마쳤고요, 참관하신 선생님께 따뜻한 참관록도 선물 받았어요.
어제와 달리 점심에 밥맛이 좋았어요.
학생들의 마음을 얻으면, 수업은 성공해요.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업 중 피드백을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6가지 방법 (5) | 2024.01.22 |
---|---|
옳은 일과 따뜻한 일, 그리고 수행평가 (5) | 2024.01.22 |
욕구 충족의 측면에서 수업 성찰하기 (8) | 2024.01.21 |
피아노 조율과 나의 이기심 (36) | 2024.01.20 |
교육을 고민하다 #2 - 수치심과 교육, 그리고 AI 활용에 대한 고민 (45) | 2024.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