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욕구 충족의 측면에서 수업 성찰하기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1. 21.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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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0반의 수업에서 또 한 번의 큰 실패를 경험하였다. 가까스로 학생들을 이해시키고 나름 성공적인 수업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다음 날 있었던 일이기에 내가 느낀 상실감은 더욱 컸다. 연이은 수업 실패로 인해 상한 기분이 해당 학급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로 굳어지지 않도록 대안의 모색이 시급한 시점이다.
한편, 나의 수업 대해 부정적인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온 학생이 다른 선생님께 불손한 언행을 하여 최근에 지도를 받은 일이 있다는 사실을, 방금 동교과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던 중 인지하게 되었다. 속으로 무척 기뻤다. 일단 학생은 그냥 '영어 수업' 혹은 영어 선생님인 '내가' 싫었던 것이[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문제 해결의 어렴풋한 실마리를 발견한 셈이므로.
 
마침 이번 주간 수업 공개 주간을 맞아 여러 선생님들의 수업 중 일어나는 교사-학생 상호작용을 분석해 왔고, 마침 용서상담, 기본심리욕구만족 등 상담심리에 대한 논문을 읽던 터이기에 내 수업의 실패 요인을 좀 더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수업 자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후 오늘 얻은 실마리와 연계하여 대안점을 모색해보려 한다.

1. 수업의 풍경

  누군가를 자살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이런 수업을 합니다, 하며 모든 학생들의 동의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나름 원만하게 수업이 진행된 다음 시간의 분위기라기엔 출석을 부를 때부터 낌새가 이상했다. 적어도 월요일 수업을 망치기 전 출석을 부를 때는 학생들이 나에게 나름 신뢰의 눈초리를 보냈었는데, 어제는 전반적으로 나에게 보내는 눈빛이 우호적이지 않았고, 졸린 눈빛을 '유지'하며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하는 학생도 있었다. 수업을 시작할 기운이 좀처럼 나지 않았다.

지난 차시 내용을 복습할 때도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시작된 이야기를 이어갔고, 본문을 다 함께 읽을 때도 소리 내어 읽기 활동에 참여하는 학생의 수가 많지 않았으며--이렇게 되면 처음에 소리 내어 따라 읽기를 시작했던 학생들의 목소리도 금세 사그라들게 마련이다--모둠별로 해석을 하는 부분에서도 양팔을 지지대 삼아 고개를 떨구고 자버리거나 아예 책상에 엎드리는 등 모둠활동 참여 자체를 거부하는 학생도 몇 있었다.

수업 시간 내내 나의 말이 보금자리를 못 찾고 허공으로 증발되어 버리는 느낌과 싸우며 힘겨루기를 이어가야 했다. 심지어 시험은 어떤 정도로 출제될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당근이나, 미세차별의 예시를 모둠별로 몸으로 표현해 보자는 대체로 인기 있는 시도조차 학생들의 눈동자를 선명하게 만드는 데 실패했다. 학생을 지목해서 한 문장을 읽어달라고 애원을 해가며 수업을 하는 처량한 모습이란!
분명 지난 시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더욱 괴로웠다.

논문을 읽으며 생각해 보니, 이유가 없진 않았다.
 

2. 수업에 대한 욕구

이은주(2021)에 따르면 기본심리욕구를 만족시키는 요인에는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이 있다고 한다. 차례대로 자율성은 자신을 표현하고 스스로 선택하려는 욕구이고, 유능성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추구하는 목표나 결과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감정이며, 관계성은 타인과 보살핌을 주고받고 있다는 신뢰를 통해 형성되는 감정이라는데, 나는 이 중 어떤 욕구도 바람직하게 채워주지 못한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난 목요일, 학생들의 충족되지 않은 수업에 대한 욕구를 교사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2.1. 유능성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미세차별은 개념자체가 학생들에게 생소할 뿐만 아니라 지문에 다른 나라 문화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이해가 가능한 내용도 들어있다. 이를테면 학생들은 Can I touch your hair?라는 말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어떻게 공격적으로 들릴 것인지 상상하기 어려워한다. 저런 말을 또다시 듣고 기분이 울적해진 흑인 친구를 곁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휘의 수준이 고1 수준의 학습자들이 배우기에는 상당히 높다. 인지심리학자인 비고츠키가 사용한 교육학적 용어에 따르면 학습이 일어날 수 있는 근접발달영역, 즉 'I+1'에 속하지 않는 교육자료인 것이다. 노력을 통해 학습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줄 수 있는 요인이 적은 본 수업을 통해서는 학생들이 유능감을 느끼도록 하기 어렵고, 자연히 열의를 가지고 학습에 참여해 보려는 학생들의 수는 적어질 수밖에 없다.

2.2. 자율성

게다가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이 어려운 내용은 본인이 배워보겠다고 '선택한 적이 없는' 내용이다. 심지어 해당 본문은 학생 자신을 미세차별의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하며 지속적인 성찰을 요구하기에 학습내용을 대하는 학생들의 자세는 편치 않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유능성뿐만 아니라 자율성 욕구도 충족받지 못한 학생들은 수업에 대한 극심한 무력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2.3. 관계성

이은주(2021)가 인용한 정현희와 박분희(2021)의 연구에 따르면 자율성, 유능성 및 관계성 중 유능성만족이 학습몰입에 정적 상관관계가 있는 반면 관계성은 오히려 학습몰입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과연 목요일의 수업에서도 그러했다. 간신히 미세차별 관련 지문 독해를 마치고, 앞서 문학 지문에서 학습한 상황을 미세차별의 종류별로 분류하며 학습 내용을 적용해 보는 활동을 할 때 학생들은 급기야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어떤 남학생은 내가 바로 앞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모둠 여학생의 눈앞에서 박수를 크게 한번 치며 “너 기분 나빠, 안 나빠? 이게 미세차별이야, 아니야?”라고 말했다.
남학생의 말이 “별 걸 다 미세차별이라고 하네. 이딴 걸 내가 왜 배우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거야?”라고 들려왔던 것은 비단 교사인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학생의 갑작스럽고도 공격적인 언행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여학생은 이내 ”그럼 이건 (아닌 걸로 하고) 넘어가자.”라고 답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학생이 더 이상의 논의를 포기한 내용은, 미세차별에 명백히 포함되는, 즉 정답인 내용이었다. 급우와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기 싫은, 즉 관계성의 욕구가 학습 몰입을 방해한 것이다.
그리고 방과 후에 먹을 간식 메뉴를 선정하는 등 서로 다른 학습자의 다양한 관계성 욕구 충족으로 인한 학습 몰입 저해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가운데 수업 종료령이 울렸고, “다음 시간에 답을 맞혀 봅시다.”라는 말을 나름 용기 내어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한 후 교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자율성과 유능성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상태에서 추구되는 학생들의 관계성 욕구는 그야말로 교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3. 화요일에는 왜 안 망했을까

그렇다면 일관성 있게 수업 분위기가 좋지 않았어야 하는데, 화요일에 수업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3.1. 지켜보는 눈

일단 뒤에 참관하시는 다른 교과 선생님이 서계셨던 것이 수업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대놓고’ 드러내기는 어렵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설명하기에는 수업 분위기가 지나치게(?) 우호적이었다.

3.2. 아이들 나름의 노오력

마치 습관을 형성하기로 결심을 해도 내가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는 것처럼, 화요일의 다짐이 목요일까지 이어지는 것은 무리였을 수도 있다. 게다가 화요일에 시도한, 수업 시작에 앞서 이해시키고 동의를 구하는--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도 유효기한은 짧았을지언정 굉장히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고 판단되는--작업이 목요일에는 없었기에 관성이 발동되기 쉬웠을 법도 하다.

3.3. 성찰교실 등 다른 변인

혹은 목요일 수업 직전 시간에 너무 힘든 내용을 배웠다거나, 학급 구성원 사이에 가벼운 말다툼이 있었다거나, 부모님께 혼나고 왔거나, 학원 선생님이 영어 수업에 대해 비하발언을 한 일이 학생들 사이에 회자되는 등 다른 변인이 개입되어 학생들이 수업 분위기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다. 굉장히 유력하게는, 서두에 언급한, 평소 수업 분위기를 많이 좌우하는 편인 학생이 성찰교실에서 지도받은 사건이 화요일 수업과 목요일 수업 사이 어느 시점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만일 마지막에 언급한 가정이 사실이라면, 학생들은 교사의 권위에 도전한 학생에 대해 어느 정도 동조하거나 혹은 단순히 눈치를 보게 되는 peer pressure, 즉 동료의 압박이 강하게 작용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수업 실패 요인 분석)

교사로서 수업 진행에 대한 효능감이 많이 떨어진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음 주 화요일 수업을 제외하면 월요일 대체공휴일, 수~금요일 학급별 테마여행, 월요일 재량휴업일과 화요일 현충일로 인해 수업 간 공백이 다소 크기에, 시간이 어느 정도 해결해 줄 것이다 일정 부분은.
또한 길고 어려운 배움의 과정이 일단락되었고, 이제 쓰기 수행평가에 돌입하게 되므로 자연스레 수업 분위기가 환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어질 과정 중심 수행평가가 학생들의 입장에서 녹록지 않은 과정이라는 데 있다. 시간의 도움으로 학습에 대한 마음이 간신히 회복되어 왔는데 첫 시간부터 깊이 있는 성찰 후 한 편의 에세이를 작성해하는 수행평가를 소개한다면, 학생들은 지난날의 악몽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되고, 따라서 한층 심화되고 고착화된 해당 학급의  태도가 수행평가 수행 자체에 영향을 미치게 될 위험성마저 있다. 그야말로 성공 혹은 실패로 이어질 중대한 기로에 나는 서 있다.

4.1. 관계 맺기

해당 학급 수업-평가의 성패에 관계 맺기가 특별히 중요한 요인으로 판단되는 이유는, 동일한 수업을 진행하는 네 개 반 중 유독 이 학급에만 어느 시점부터 부정적인 정서가 흐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다른 어떤 학급의 학생들은 “행복”, “재미”, “좋은”, “열심”, “정” 등의 긍정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나의 수업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동일하게 자율성과 유능성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다소 어려운 수업 내용에 대해 학급별 태도가 이토록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은, 관계성, 혹은 라포 형성 측면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놓여있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지난 금요일 동아리 시간이었다. 여학생의 눈앞에서 손뼉을 크게 치며 수업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던 바로 그 아이가--한 번 불러다 지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끝에, 딱히 복도에서 마주쳐지지도 않았고 찾아가자니 반감만 살 것 같고, 나 자신도 바빠 그냥 말았던--우리 동아리실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 저 학생이 우리 동아리였지, 참. 이것은 놓치면 안 되는 기회였다.
일단 선배들을 공략했다. 말썽꾸러기 같은 장난을 그치지 않고 있던 선배 학생들과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를 과시한 이유는--실제로도 귀여운, 마냥 어린아이 같은 녀석들이다--나는 네가 그렇게 내 수업에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겪어 온 시간을 통해 선배들은 알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후에는 바비큐 숯불 구이를 하는 동안 그 아이에게 다가가 고기는 많이 먹었는지, 맛있는지, 한껏 다정한 말투로 질문을 하였다. 나는 선배들과도 그렇듯 너와도 잘 지내고 싶어, 그러니 너무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는 내려놓아 주겠니, 하는 간청이었다. 같은 말실수를 한다 해도, 경찰에 신고를 당하는 교사는 학생과 관계 맺기가 되어 있지 않은 교사일 때가 많다.
그렇다고 내가 마음껏 말실수를 하기 위해, 혹은 학생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서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싫어하는 선생님의 교과서는 쳐다보기도 싫은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은가. 그 아이와, 그 학급의 ”학습“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공을 들여야만 한다. 관계 맺음은 수업 장악을 위한 필수조건이기에.
성찰교실에 다녀왔다는 그 아이, 그리고 영어를 좀 열심히 해보려다가 좌절감을 심하게 겪은 듯 보이는 다른 여학생과는 어떤 건강한 관계 맺음을 시도해야 할까.

4.2. 유인가 제공하기

적절한 당근도 학생들의 동기 부여에 효과적이다. 수행평가의 성공적인 수행이 가져다줄 가시적인 유익--이를테면 작년 선배들의 생기부 기재 내용 예시나 수업 평가 결과와 같은--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선배들이 이토록 수업에 만족스러워했다는 것은, 안 그래도 내게 우호적이지 않은 감정이 형성되려 하는 아이들에게는 자칫 잘난 체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니 관둬야겠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섬세해야 한다.

4.3. 적절히 밀당하기

이제까지 견지해 오던 ‘이토록 어려운 학습 내용을 안겨줘서 선생님이 미안하다’는 식의 저자세를 이제는 내려놓을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모름지기 사람의 심리가, 상대방이 저자세로 나오면 본인은 강자의 위치에 해당하는 자세를 취해도 되는 것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의 경우 더욱 잘 적용되는 법칙인 듯하다. 그리고 학생들은 실제로 아직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에 이러한 심리에 더욱 쉽게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유인가 제공과 관련하여 언급한 것처럼, 이 수행평가가 본인의 중장기적 삶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떠올려보도록 하며, 긍정적인 순환이 시작되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눈빛과 어투와 같은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교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선생님이 우리를 이끌고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인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를, 학생들은--이것은 유아들도 마찬가지이다--동물적 감각으로 인지한다. 이러한 기싸움을 위해서는 교사도 자신감이 있는 상태여야 한다.
본인의 물건이 가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인의 물건을 사고 싶지 않아 지듯, 수업에 확신이 없는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 어렵다.

4.4. 도움 제공하기

버거운 수행평가를 해내야 하는 학생들에게 적절한 도움 제공을 약속하고, 또한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도 중요하다. 교사가 제공하는 디딤돌을 통해, 염려했던 것보다는 수월하고 또한 많은 배움이 일어나는 유익한 과정이라는 것을 느끼면 학생들의 불만은 자연히 잠잠해질 것이다.


나오며

매 순간 전체 학급과 학급을 이루는 구성원 개개인, 구성원 간의 정의적이고도 인지적인 측면의 역동을 고려해야 하는, 수업은 종합예술이다.
교육의 효과는 바로 드러나지 않고 대개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위에서 기록한 노력의 결실을 명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다. 또한 교사가 수업 상황에서 통제할 수 없는 변인의 영향으로 인해 일련의 수업-평가의 과정이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썩 만족스럽지 못하게 마무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성찰과 노력, 고민 없이 진행되는 생명력 없는 수업은[혹은 그런 수업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교사로서의 나의 모습은] 상상하기가 어렵기에, 오늘 주어진 고민을 감내하기로 또 한 번 결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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