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불안의 문제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서 한동안 덮어두었던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얼마 전부터 선생님들과 함께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책을 읽으며 도덕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어 느낀 바를 책에서 발췌한 내용과 함께 기록하려 합니다.
19세기의 도덕성
다음은 앤드루 카네기가 자선행위에 대해 그의 저서 <자서전>에 기록한 내용이라고 하네요.
이른바 자선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것이 낫다. 자선으로 먹여 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무익한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 열심히 일하는 근면한 사람에게 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은 적을수록 좋다. 자선 행위로는 개인이든 인류든 나아질 수가 없다.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귀한 사람은 결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p.112에서 발췌
다음은 존 D. 록펠러의 말이라고 합니다.
결국 부는 도덕적인 인간에게만 찾아온다. 시편 저자와 마찬가지로 가끔 악한 자가 번창하는 것을 보기도 하나, 그것은 가끔일 뿐이다. 경건한 삶에는 부가 따른다.
- 같은 책 p.107에서 발췌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어 19세기 중반 서구사회로부터 깊이 자리 잡고 뻗어나간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고, 부에 도덕성이 부여되고, 경건함과도 연결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것도 힘겹고 서러운데, 게으름과 심지어 영적 타락에 대한 비난까지 받게 된 것이군요.
21세기의 도덕성
한편 요즘 시대에 카네기나 록펠러와 같은 말을 타인 앞에서 하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거나, 가치관이 매우 왜곡된 사람 취급을 받기 쉽지요. 다양성과 포용, 보편적 복지 등이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은 21세기에는 '도덕성'의 의미가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능력주의적 시각이 여전히 사회 전반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긴 하지만 말이죠.
최근 동료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듣고 충격을 받은 내용이기도 한데요, 반항하는 여주를 벽으로 밀어붙여 강제 입맞춤을 하는 드라마의 장면이 불과 10년 전에는 '로맨스'로 분류되었지만 현재는 '성폭력'으로 분류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2세기의 도덕성?
세습주의 '나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국가의 지도자가 될 거야'라는 말을 하인이 한다면 도덕성이 높다는 말은 커녕 미친 사람 혹은 대역 죄인 취급을 받았을 것처럼, 100년 후에는 어쩌면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다양성을 인정하는 현시대의 도덕성이 '착한 사람'의 특징이 아닌 '구시대의 유물' 혹은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치부될지도 모르고, 인공지능 칩을 뇌에 심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날로 반사회적 인물로 낙인찍힐지도 모릅니다. Who knows?
도덕을 넘어
도덕은 변합니다.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발 붙이고 살아가는 시대의 규범과 도덕의 틀 안에 살아감이 마땅한 도리이지만, 동시에 도덕성이 전부가 아닌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일 테고요.
복되고 평안한 밤 보내시고 기쁜 새 아침 맞이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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