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단편소설 <작별>은 성실하고 어려우며 슬픈 삶을 살다가 별안간 눈사람이 되어버린 '그녀'의 이야기입니다. 엄마들에게는 특히나 너무도 아픈 책이라는 추천을, 엄마인 지인에게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작품에는 손에 대한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해설 같기도 하고, 비슷한 의미를 다른 말로 다시 표현하는 paraphrasing 같기도 하여 '다시 쓰다'라는 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직접 인용한 표현은 작은따옴표로 표시하였습니다.
바스러진 손가락 끝
그녀가 자신이 눈사람이 되었음을 처음 알게 되는 것은, 무딘 감촉의 원인을 확인하고자 장갑을 벗었을 때입니다. 손가락을 문지르자 고운 눈가루가 떨어져 내리고, 조금 힘을 주어 만지자 손가락 끝이 부스러져버립니다. 그녀의 존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네요.
놓아버리는 손, 민망해진 손
그녀의 연인인 현수가 도착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정말로 눈사람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난감해합니다. 이윽고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손이 녹아버릴 것을 염려한 그녀가 손을 놓아버리고, 현수는 민망해합니다.
자유로워진 손
손을 잡고 걷다가,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이번에는 현수가 먼저 그녀의 손을 놓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자유로워졌'다고 작가는 표현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일까요. 과연 자유를 원했던 것일까요, 그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헤어짐을 해방이라고 표현할 만큼 현실이 무겁고 괴로웠던가 봅니다.
성과 없이 반복되는 손동작
현수는 온기를 되찾기 위해 딱딱하고 붉어진 손등에 호호 입김을 불어 보기도 하고,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용이 없네요. '더듬이'처럼 혹은 '실'처럼 서로를 연결해 주던 무언가를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종말을 앞둔 그녀의 상태를 직감한 현수가 사그라드는 불씨를 다시 지피려고 노력해 보지만, 꺼져가는 그녀의 생명의 빛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버티는 손
퇴사 이후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 사장의 사무실 앞에 앉아 며칠을 버틴 끝에 급여를 받는 현수를 보며 그녀는, 공격을 위함이 아닌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버티는 데 사용되는 나무늘보의 발톱을 떠올립니다. 현수의 실직은, 사실 시간 순서상으로는 가장 앞서 일어난 일입니다.
짐을 받아 드는 손
현수에 이어 퇴사 통보를 받은 그녀가 짐을 챙겨 나오며 연락했을 때, 현수는 다가와 그녀에게서 짐을 받아 듭니다. 그녀가 그와 자신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게 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중 하나입니다.
작별하는 손
저녁을 사 먹으라며 현수에게 지폐를 들려 보내고 아들을 만나러 가면서,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여느 때 같았으며 몇 번이고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을 텐데, '이것은 잠정적인 이별이라서' 한 번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가, '허공의 유리를 닦듯' 한 번 더 손을 흔듭니다. 더 이상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없고, 눈사람이 되어 몸이 녹기 시작한 그녀가, 마지막을 직감하고 현수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열쇠를 찾는 손, 아이를 안는 손
아들 윤이가 전화도 받지 않고 문도 열지 않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둔해진 손으로 열쇠를 찾아 철문을 엽니다. 그러는 동안 손끝이 더 바스러졌을까요? 날이 풀리면 엄마가 녹아버릴까 봐 걱정하는 아들을 안심시키며 그녀는, 어린 시절 윤이와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싱글맘으로서 생활비를 벌고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느라 늘 고단했던 자신과 아이의 결핍에 대한 죄책감도 떠올립니다. 다 커서 이제는 엄마와 붙어 있기를 부담스러워하게 된 윤이를, 그녀는 안습니다. 북받쳐 오르는 정에 그만 그녀의 가슴과 눈가가 녹아 흘러내림을 느낍니다. 그녀는 아들을 안았던 팔을 풉니다. 그리고 훈기를 피하기 위해 현관문을 닫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악몽을 꾸고 또 꾸던 공간이거늘, 그 따뜻함으로 인해 다시 삶에의 의지가 생길까 봐 염려가 되었던 것일까요. 그녀는 집과 작별을 합니다.
눈물을 닦는 손
그녀는 아이에게 끝말잇기를 제안합니다. 놀자고 보채는 아기와 도무지 놀아줄 기력이 없었던 미안함을 만회하려는 시도였을 수도, 아니면 피곤에 절어 바닥에 누운 채 아이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그래서 자주 함께 했던 놀이의 추억을 되새기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이 흘렀던가 봅니다. 녹아버려 움푹 패인 엄마의 눈시울 밑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줍니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서럽게 흐르던 예의 눈물도, 아기가 다가와 닦아주었었는지도 모릅니다.
유언장을 붙이던 손
대학 동창의 부고를 들은 다음 날 그녀는 유언장을 써서 냉장고에 붙여놓았습니다. 남동생에게 양육과 재산 관리를 부탁하고, 주요 문서와 물품의 위치, 개인정보를 적어놓고, 남동생과 아이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긴 종이를, 그녀는 뒤집어서 붙였다고 합니다. 아마 윤이가 싫어했던가 봅니다.
들여보낼 수 없는 손
추우니 들어가라고 하면서, 그녀는 아이의 손을 '무심결에' 쥐고 있었다고 합니다. 손이 더 녹아버릴 테지만, 그래서 생명이 더 빨리 사그라들 테지만, 그래도 아이를 만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아이의 표정을, 그녀는 '시야가 흐릿해서' 잘 볼 수 없었다고 하네요. 화면을 바라보는 제 시야와 비슷했던가 봅니다.
왼쪽 허리를 짚어 버티는 손
윤이를 안을 때 왼쪽 가슴에서 흘러내린 따뜻한 물이 고여, 왼쪽 옆구리가 계속해서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왼쪽 허리를 두 손으로 짚어' 버팁니다. 그리고 차가운 공기를 찾아 내려갑니다.
전화 버튼을 누르는 손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 어머니에게 전화합니다. '불안해하시면 더 안 나아요', '물리치료 꾸준히 받으셔야 해요' 하고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당부합니다. 유서에 윤이의 뒤를 부탁한 남동생에게는, 전화를 걸지 않기로 합니다. 그 대신, 회전목마에 삼남매가 같이 올라탔던 때의 사진을 묘사한 유서의 문구를 떠올립니다.
'네 포동포동한 뺨하고 입술은 오빠의 등과 내 품 사이에 꽉 끼어서, 무슨 물고기같이 우스꽝스럽게 튀어나와 있어.'
뭉툭해진 손
점차 얼굴의 윤곽도 희미해지고, 손끝도 뭉툭해져 지문도 손톱의 윤곽도 사라졌습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진눈깨비입니다. 눈이 온몸 구석구석을 복원해 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은 탄식으로 바뀌고, 그녀는 빠른 속도로 녹아내립니다.
너무도 아파서 글을 멈추었다가, 생명력이 요동치는 에세이 한 편을 읽고 다시 돌아와 쓰는데도 눈물이 많이 납니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느꼈지만, 한강 작가의 글은 정말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릅니다. 다시쓰기 한 글로는 글을 온전히 음미할 수 없으니, <작별> 원전을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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