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학살 등 잔학행위가 일어나는 이유를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대안 제시를 시도하는 책 <명령에 따랐을 뿐!?>을 80여쪽 남겨두고 다 읽었습니다. 어떤 책은 끝까지 다 읽어내려면 제법 인내심이 필요하기도 한데 이 책은 페이지가 어느새 이렇게 많이 넘어갔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다양한 연구 결과가 수록되어 흥미롭기도 하고, 영감을 많이 얻을 수 있고, 무엇보다 제 최근 관심사와 무척 관련성이 높아 더욱 잘 읽히는 듯합니다.
오늘은 거리감이 불러올 수 있는 단절감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써볼까 합니다.
1. 물리적 거리와 단절감
우리는 대면한 상태에서 타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실험 결과 다른 방에 있는 사람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는 일보다 같은 방에 있는 사람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는 일을 실험 대상자들은 훨씬 어려워 했다고 합니다. 또한 충격을 가하라는 명령이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졌을 때보다, 전화상으로 이루어졌을 때 복종하는 경향성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같은 공간이 있는 경우, 타인의 고통을 더 잘 느끼게 되어 고통을 주는 일을 망설이게 되고, 타인의 명령에 더 잘 복종하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타인과 물리적으로 가까이에 있을 때 유대감을 더 많이 느낀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대면하여 실체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타인과 더 잘 공감할 수 있게 되는가 봅니다. 이를 적용하여 대면 수업과 비대면 수업의 효과가 같을 수 없다는 점도 유추할 수 있겠고, 회의를 할 때 전화나 메시지로 논의하는 것보다는 직접 만나서 소통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의사 결정에 이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2. 심리적 거리와 단절감
연구 결과 관리자와 같이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거나 말단에서 명령을 직접 시행하는 위치에 있을 때보다, 중간자의 위치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입장에 있을 때 반사회적 행동에 임하기가 더 쉬워진다고 합니다. 중간관리자는 '회장님께서 하라고 하셨어.'라고 전달하면서 명령을 내리는 행위에 대한 책임감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누군가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초래하는 책임감으로부터도 거리를 두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상을 다른 말로 하면 주체의식이 줄어든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스스로 내린 판단'이라는 인식이 적으니 자연스럽게 책임감이 덜할 수밖에 없겠고요.
지연히 최고 책임자에서 가장 하위 직급에 이르는 계층의 구조가 복잡할수록 조직의 의사결정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다고 합니다.
3. 거리감과 비인간화
혹시 '그들'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하시나요? 이 단어는 나의 집단이 아닌 외부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우리'의 상대어입니다. 캐스파 박사는 '우리' 대 '그들'로 범주화하고 대결 구도를 형성하는 행위에 대해 '비인간화와 집단 잔혹행위로 가는 길'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근거는 사람들이 외집단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점과(이러한 현상은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아닌 외부 집단이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볼 때 공감과 관련있는 뇌의 영역인 전대상 피질과 전측 섬의 활동이 감소했다는 점을 듭니다.
나와 물리적 거리가 가깝지 않고, 명령을 전달하는 입장이며, '우리'라는 소속감을 갖지 않는 상태일 때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굉장히 위험한 상태가 될 수도 있겠네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때로 완악할 여지가 있는 존재인지를 인정하고, 매 순간 성찰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혹시 우리 함께 '그들'이라는 말 대신 존중의 마음을 담아 명확한 지칭어를 사용해 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모두에게 좀 더 따뜻한 세상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요. ^_^
평안하고 따뜻한 겨울밤 보내셔요.
'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밀리 A. 캐스파 <명령에 따랐을 뿐!?> 독서 일기 - 명령을 따르는 동안 뇌에서 벌어지는 일 (13) | 2025.01.23 |
---|---|
<작별하지 않는다> 독서일기 - 하지만 (1) | 2024.12.24 |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섬뜩한 눈이 내린다 (41) | 2024.12.20 |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기 전에 <작별>을 먼저 읽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38) | 2024.12.19 |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기 전에 <작별>을 읽어야 하는 이유 (46) | 2024.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