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독서를 통한 성찰 일기

글을써보려는사람 2025. 3. 3.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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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일에 대해, 스스로의 무지하고 준비되지 않은 모습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정 부분, 아니 상당 부분, 개학을 앞두고 염려가 큰 상태여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제가 읽고 생각하고 '알고 있다'고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하찮고 얄팍할 뿐인가를, 작가들과 또 여러 블로거 분들의 기라성 같은 글을 보면서 더욱 느낍니다. 최근에는 글을 한 편 써보려고 도전 중이기에 더욱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며, 절로 겸손해지는 중입니다. (내일부터 당장 학생들 앞에 서서 '가르쳐야' 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실로 난감한 일입니다.)
 
그런 와중에 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책을 만났습니다.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경제학자 러셀 로버츠 박사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읽고 감명을 받아 집필한, <도덕감정론>의 현대판 해설서와 같은 책입니다. 실생활의 예시와 애덤 스미스를 인용한 구절을 가독성 높은 문체로 풀어내어, 저처럼 독서의 깊이가 깊지 않은 사람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 기만과 자기 개관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신감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좀 더 명확하게는 자신감이 줄었다기보다 실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 러셀 로버츠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105-106면

 
자기 객관화를 통해 스스로의 위치 혹은 실력을 잘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교만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같은 책의 뒤에서 스미스는 또한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지적합니다. 위와 같이 '자신감이 점점 줄어드는' 중이라고 여길지라도, 이 또한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상태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상태일 수도 있겠다'는 마음가짐 자체가 겸손의 태도이므로,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 당시에는 '덜 기만적'일 수 있겠네요. 우리의 내면에는 끝도 없는 기만의 파도가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못났어'라고 시종일관 생각하는 것이 '자기 객관화'의 상태라고 볼 수도 없겠지요. '오늘도 독서에 집중하지 못했지만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한 점이 기특해.'와 같이 자신의 노력과 시도에 대한 합리적인 평가를 하는 것도 대체로 '객관적인' 판단에 해당할 테니까요.
 
 
 
한편 다음과 같은 구절에 저는 약간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스미스의 주장에 따라 추측해본다면, 메이도프(희대의 사기꾼)는 감옥에 가기 전부터 불행했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 안의 공정한 관찰자에게 이미 범죄 사실을 들켰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많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때조차, 적어도 메이도프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소문에 의하면 메이도프는 체포된 뒤에 불안해하기는커녕 도리어 안도했다고 한다. 더이상 자기를 속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같은 책 74면

 
러셀 로버츠 박사는 사기꾼인 메이도프가 스스로의 범죄 행각에 대해 (타인은 속였을지언정) 자기 자신이 '알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지녔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보유한 사람이나, 각종 이데올로기에 심취하여 극단적인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는 설득력있는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공정한 관찰자(전지전능한 조물주, 혹은 신전 의식)'가 실종된 상태인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테러 집단, 극우 세력과 같은 극단적인 예시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저마다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판단의 기준이 다른 것만 보아도, '공정한 관찰자'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다음 구절을 읽으니, '천박함'과 '현명함'의 기준조차도 모호하게 여겨집니다.
 

가장 나약하고 가장 천박한 인간들만이 칭찬을 받으면 크게 기뻐한다. 자신이 절대로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거짓 칭찬을 거부할 줄 안다.
-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재인용

 
 
'1부터 193까지는 옳은 것, 193.0000001부터는 그른 것', '이 중 38.2%는 참, 61.7%는 거짓'과 같은 기준이 명확하게 있어 모든 사람들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면 참으로 편리하련만, 우리가 발 붙이고 살아가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군요. 한편 좀 뻔뻔하고 덜 양심적으로 살면 오히려 삶이 수월하고 평탄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도 우리가 '선함',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책을 집어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겠고요.
 
학생들에게도 수업을 통해, 삶을 통해 '우리 함께 생각하면서 살아가자'라는 메시지를 전해야겠네요.
 
복된 밤과 평안한 새날 맞이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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