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것이 누군가에게 아주 큰 슬픔을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교사인 누군가에게 메모를 남길 때 이름 뒤에 선생님(teacher)의 앞글자인 't'를 늘 붙이던 누군가가 어느 순간 't'를 빼고 이름 석 자만 썼다고 칩시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사실을 유추할 수 있을까요? '당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혹은 '당신같은 사람을 선생으로 인정할 수 없어.'와 같은 의미를 전달하게 될 수도 있겠네요. 메모를 받아든 교사는 무척 의기소침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아주 작은 것이 아주 커다란 위로를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린 후 산길의 포슬포슬한 낙엽을 밟는다거나, 때아닌 폭설로 인해 얼어붙은 나무들을 대거 베어내 휑뎅그렁해진 자리에 고사리며 이끼가 올라와 다시금 파릇파릇한 잎으로 뒤덮인 산자락을 보게 된다던가 하는 일 말이지요.
저는 최근 깊은 절망과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뚫고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나도록 만드는 동인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지요.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존재, 혹은 가치를 붙들고 있어서 살아남는 중일 테니까요.
저는 두 가지 지점에서 크나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 말씀을 통한 하늘의 위로입니다.
(누가복음 20장 / 개역개정)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요한복음 7장 / 개역개정)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세상에.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말을 책잡히고 귀신이 들렸다는 비난을 들으셨다니요. 저야 예수님과 달리 죄도 많고 십자가 처형을 당해보지도 않았지만, 그저 그리스도께서 저의 아픔에 공감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에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요.
두 번째는 말라붙은 소금물 그릇입니다. 약 2주 전에 감기에 걸려 소독을 하고는 아무렇게나 한참을 방치에 두었거든요. (제가 좀 게을러야지요. 참으로 부끄럽게도 먼지도 많이 보이네요.) 그릇에서 물은 날아가고 다음과 같이 소금 결정만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아시나요?
아무리 물이 섞여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것처럼 보여도, 그 아름답고 반짝이는 소금 결정이 결국은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하고요. 나도 눈물 콧물 얼룩진 만신창이 같은 모습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이렇게 지니고 있겠지, 하고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소금처럼 살고 싶다.
형체가 없어져도 소금이 아닌 건 아니니까.
형체가 없어진 순간에도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시 회복하니까요.
복되고 아름다운 한 주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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