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에 대한 나의 경험과 다니엘 카너먼을 통한 확증
질문에 따라 학생들의 반응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이번 학기 수업의 개선점을 말해볼까요?
라고 질문하면 수업의 결점을 떠오르게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수업에 대한 만족도를 (의도와 상관없이) 낮게 인식하도록 하기 쉬운 반면,
이번 학기 수업을 통해 향상된 점을 말해볼까요?
라고 하면 수업을 통해 자신이 얻은 유익에 대해 떠올리게 하므로 수업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기 쉽다.
물론 슬프게도 같은 질문이 어떤 학생들에게는 '수업을 통해 배우거나 향상된 점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할 수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질문하는 방식이 응답의 경향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다니엘 카너먼은 그의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이를 점화 효과라고 소개하고 있다.
플로리다, 깜빡이다, 회색, 주름과 같은 노인과 관련된 단어를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느린 속도로 걸어 지정된 장소로 이동했다고 한다. 어떤 질문을 활용하여 생각의 물꼬를 어떻게 트냐에 따라 생각이 형성되고 표출되거나 행동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한편 카너먼은 같은 책에서 회상용이성 편향이라는 개념을 통해, 회상하기 쉬운 내용이나 방향에 대해 더 쉽게 믿어버리는 경향도 소개했다.
이를테면 수업 개선점을 10가지 이상 말하게 한다면 학생들은 수업의 한계점을 몇 가지 생각해 내다가 더 이상 떠올리기 어렵다는 점으로 인해 자신들이 수업에 대해 느끼는 만족도가 높다고 믿어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도 분명히 느낌으로 경험해 본 현상이긴 하다.
아무튼 이번 포스팅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질문하는 방식에 따른 차이는 점화 효과에 대한 것이다. '아'를 '어'로 만들어 좀 더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보자는, 뭐 그런 비슷한 거다.
급식 설문을 작성하며 시도하는 질문의 중요성에 대한 실험
학교평가 설문 문항 초안을 제작하느라 어제 오후 제법 긴 시간을 할애했다. 일단 질문의 문항 수와 글자 수가 너무 많아 설문 응답률이 현저히 낮았던 작년의 학교평가 질문지를 보완할 필요성이 있었다. 글자가 많은 데다 중언부언하는 글은 독자의 짜증을 아주 쉽게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예를 들어 매 평가항목 다음에 동일하게 붙어있는 다음의 문구는, 읽기가 매우 힘겨웠다.
- 위의 평가항목(공동체적 학교 문화 조성)과 관련된 의견을 자유롭게 써 주시기 바랍니다.
- 올해 특히 잘 진행되었다고 생각하는 활동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칭찬해 주세요.
- 또한, 만족도가 ①(매우 미흡) 또는 ②(미흡)인 항목이 있는 경우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를 써주시고, 개선안이 있으시다면 자유롭게 제안해 주세요.
학교 교육활동과 관련하여 잘 진행되고 있는 부분을 칭찬해 주세요. 만족도가 ① 또는 ②인 항목의 경우 이유를 써주시고, 개선점을 제안해 주세요.
급식은 음식의 질이나 양이 적당하고 위생적이다.
급식은 음식의 질이나 양이 적당하고 위생적이며 성장기의 학생들을 위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공하고, 채식 급식, 일회용품 자제 등 생태전환 교육을 위한 노력을 함께 기울이고 있다.
위의 질문에는 질이나 양과 위생도 중요하지만 급식은 영양가를 골고루 갖춘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 생태전환 교육에 동참해야 한다는 점 등의 학교급식이 지향해야 할 가치도 함께 강조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는 응답자들이 자신의 음식 기호에만 초점을 맞춰 반응하는 것을 자제하도록 만들 것이다. 아마도.
한 달 여 후에 작년과 올해의 응답을 비교분석하는 포스팅을 즐거운 마음으로 써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을 맺으며
설문문항을 어떤 식으로 작성하는가 하는 것은 응답과 추후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람과의 일반적인 상호작용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긍정적 상호작용을 촉발하고, 선한 가치를 일깨워주는 좋은 말 걸기를 시도하는 내가 되고 싶다.
아이들에게 순간순간 짜증을 유발하거나 짜증을 표현하는 말로 대화를 메운[막은] 오늘의 순간들을, 반성한다.
3인용 자전거 대여하는 곳까지 걸어가기 싫어서 그냥 놀이터에서 기다리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그래도 찾아와 보겠다며 어떻게 가느냐고 묻는 너에게, 오든지 말든지 집으로 알아서 찾아가던지 마음대로 하라는 모진 말 해서 미안해, 엄마가.
마음속으로는 기뻤으면서, 참으며 달래던 순간들에 대한 불평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근데 길 따라 쭉 오라는 설명이 그렇게 어려워서 계속 전화로 물어본 거뉘. (뒤끝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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