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새치기에 대하여

글을써보려는사람 2023. 9. 18.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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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수업과 업무로 휘몰아치는 오전 시간을 보낸 후 부랴부랴 조퇴를 하고, 코로나 자가진단 키트 검사 결과 양성이 나온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에 갔다. 점심을 먹고 도착한 시각은 1시 22분.

 

두둥, 이 소아과는 점심시간이 1시부터 2시여서, 앞으로 40여 분을 기다려야 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2시 땡 하면 진료 보고 바로 집에 가서 업무도 좀 보고 낮잠도 좀 자고 피아노도 좀 칠 수 있겠거니, 했다.

 

그렇지가 않았다.

 

20분 정도 지나자 한두 사람씩 몰려들더니 1시 50분경에는 불 꺼진 소아과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책을 읽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오후 진료 순서 1번을 사수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책 내용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디어 불이 켜졌고, 오전 진료가 마감되기 전 오후 진료를 미리 예약한 7명의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내 옆에서 두 아이의 엄마와, 또 다른 어떤 손주를 대동한 할아버지가 나를 앞질러 접수대로 진격하는 바람에 우리 아이 순서는 졸지에 10번이 되었다.


50분을 더 기다렸고, 팀추월(?)을 당해 추가로 기다리게 된 마지막 10분여의 시간은 정말 마음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특히 그 아이엄마는 우리 모녀가 가장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고, 새치기 전후로 눈도 계속 마주쳤는데. (나름 기싸움 작렬...이었나 보다;;)

겸연쩍어하는 표정으로 양해를 구하는 눈빛조차 전혀 읽을 수 없음에,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새치기'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였는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버스를 탈 때, 우리는 버스 출입문 근처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가는, 정류장에 도착한 순서가 꼭 지켜지지는 않는 채 서로 조금씩 양보해 가며, 우연적이고도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순서로 버스에 탑승한다.
공항 검색대 앞에 줄을 설 때에도, 내가 선 줄보다 내 옆줄이 훨씬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도 하고, 운전을 할 때 나의 차선 옆 차선들이 유독 잘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조금은 더 늦게 왔으나 나보다 먼저 버스에 올라탄 사람을, 운 좋은 공항 검색대나 차선을 선택한 사람을 우리는 '새치기꾼'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소아과에서 나보다 빨리 접수한 엄마의 행동은, 정의나 공정의 잣대로 비난할 수 있다기보다 그저 조금 얄미운 재빠름, 혹은 양보할 여유 없음, 아니면 기다리다 지침(?) 정도의 문제로 보아야 할는지도 모른다.



 

 

 

 

 

새치기할 권리를 구입하다, 매직*스

한편, First come, first served.의 통념을 합법적으로 깨뜨리는 것이 있으니, 바로 매*패스다. 일반적으로 2시간씩 기다려 하루종일 놀이기구 3개 타면 다행인 놀이공원에서 줄 서지 않을 권리를, 우리는 돈 주고 살 수 있다.

나도 도저히 하루 종일 인파 속에 줄 설 엄두가 나지 않아 이를 이용한 적이 두어 번 있으나, 사용할 때마다 목뒷덜미가 괜히 화끈거리고, 줄 서있는 사람들과 도통 눈을 못 마주치겠는 마음이 든다.

내가 몸에 익혀 온 도덕적 잣대나 질서와는 다른 종류의 도덕이 놀이공원에, 백화점 VIP 라운지에, 대학 입학처에, 사회 곳곳에 내돈내산의 이름으로 스며들어 있다.

검색을 좀 해보니 마이클 샌델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시장이 도덕을 밀어내는 현상에 대해 논했다고 하 읽어봐야겠다.

출처: 교보문고 인터넷 서점

 

 

 

 

 

 

 

점심시간에 몰려온 대기자들이 서로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도록 순서를 적는 종이와 펜이라도 좀 비치해 놓으면 어떻겠는가 하고 간호사분들께 제안을 하고도 씁쓸한 마음에 한참을 생각해 본다.

 

사도바울처럼, 내 권리를 주장하는 대신 기꺼이 내어주게 되면 사회가 참 따뜻해질 텐데.

나부터도, 워낙 바쁜 오후 일정이 있으셨나 보다, 하고 넘겼다면 마지막 10분이 그토록 싫지는 않았겠지.

 

오후에는 코*트코에서 '먼저 계산하시라'며 길을 내어준 분을 뵙고는 마음이 정말 따뜻해졌는데.

 

모르겠다. 나도.

 

 

 

 


이번 주 중반부터는 또 바빠질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 아이들 엄마는, 나에게 글감을 물어다 준 제비 같은 분인가봉가.

하여간 결론은,

월요일의 소아과는 갈 곳이 못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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