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냄새와 게으름에 대한 사유

글을써보려는사람 2023. 9. 1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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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으름에 대하여

게으름이 자랑스러운 때도 있다.

대체로 나는 수업 하나를 구상하기까지, 한 장의 학습지를 만들기까지, 충분한 구상과 잉태, 혹은 숙성의 기간을 거친다. 즉흥적으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도 있어서 학습지를 뚝딱 만들어내는 순간도 더러 있으나, 대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먼저 지문을 한 번 읽어보며 기본적인 내용을 파악한 후에는, 상상을 시작한다.
교과서 지문이라는 원재료를 가지고 어떤 요리를 만들어낼 것인가를 결정하기까지는--교과서 지문은 질문 만들기 수업이 재료가 될 수도 있고, 연극 대본으로 재탄생할 작품의 원작이 될 수도 있고, 글을 구조를 분석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기에--시간이 필요하다.
 
파블로 네루다를 제법 읽어보기라도 한 양 그의 말을 인용하기가 민망하긴 하지만,
 

시가 나를 찾아왔어... 얼굴도 없이 저만치 서 있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어

- 김용규 <은유란 무엇인가>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구를 재인용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711/85304551/1

 

 

마치 시가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시인처럼, 나는 그럴듯한 수업 아이디어를 기다린다.

이런 나의 성향이 외부에서 보기에는 일을 미루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게으름이라는 이름을 붙여 본다. 
그리고, 이런 류의 게으름에 대하여 나는 제법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게으름은 부끄러울 때가 많다. 

아이 학교에서 김밥 만들기 실습을 한다기에 나중에 반찬으로 활용하면 되겠다 싶어 여분으로 사두었던 게맛살이 유통기한이 지났다. 버리려고 냉장고에서 꺼냈는데, 하나하나 속 봉지를 뜯어 음식물쓰레기통에 넣기가 귀찮아 겉포장도 뜯지 않은 채 쓰레기통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올려 두었다. 그리고 한 3주가 지났나 보다. 게맛살 겉포장지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더욱 만지기가 싫어져서, 며칠을 또 묵혔다.
 
간밤 딸아이가 끓여달라고 졸라놓고는 정작 몇 입 먹지 않아 위는 마르고 아래는 불어버린 라면을, 오늘 출근길에 유독,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마음을 먹은 김에 부풀 대로 부푼 게맛살 봉지에도 손을 뻗었다. 장갑을 끼고 벗을 시간도 없는 그 시각에 말이다.
 
악취가 순식간에 온 베란다와 주방을 메웠다. 속봉지를 하나하나 벗겨내고 부패되어 흐물흐물해진 게맛살을 봉지에서 떼어내 음식물 봉지에 넣고, 봉지를 다른 봉지에 싸 일반쓰레기 봉투에 마침내 넣어놓고는, 손톱 아래까지 비벼가며 두어 번 씻었다.
 
나의 게으름이, 오늘은 부끄러웠다.
 
 
 
 
 
 
 

2. 냄새에 대하여

이상했다. 냄새가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출근길 운전대를 잡은 내 손에서 아까 그 냄새가 났다.
하필이면 오늘은 말하기 수행평가 공동 채점을 위해 1교시부터 동교과 선생님들과 나란히 붙어 앉아 채점을 논의해야 하는데, 내 손의 시궁창냄새가 선생님들의 후각세포에까지 도달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세 번이나 손을 더 씻었지만 냄새가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손세정제에 첨가된 향료로도 도통 구린내를 감출 수가 없었고, 흡착력이 좋다는 커피찌꺼기로 손을 부벼 씻어 보아도 냄새는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이에 나는 생각했다.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는 것들은
사랑, 가난, 재채기뿐만이 아니구나.

 
이윽고 또 생각했다.

내가 만지는 것이 나의 손에 냄새로 베어 들듯, 나의 마음의 생각과 행적은 나의 모습에 드러날 수밖에 없구나.

 
문제의 냄새는, 수업 전후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손을 씻고 또 씻은 후에야 점차 엷어져 다행히 지금은 없어졌다. (후각이 마비되었기 때문은 아니길 바란다..;;)
 
 


 
글을 맺으며

적당한 게으름은 생각의 숙성에 도움이 된다.
게으름도 정도껏 피워야 한다.
냄새는 감추기 어렵다.
냄새는 오래간다.

매사 생각과 의사 결정의 내용과 시기가 적당할 수 있다면. 향기는 못 풍길지언정 악취가 나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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