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학생들은 어른스럽다.
애늙은이 같다는 말이 아니고, 일반적인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 비해 성숙하고 정중하다는 의미이다.
"복도에서 뛰지 말아라. 낙서하지 말아라. 새치기하지 말아라."는 등 통제하는 언어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다.
통제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학생들이 스스로 바람직한 결정을 내릴 줄 알게 되는 것인지, 학생들 개개인이 훌륭하여 통제를 할 필요성이 없는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개인이 모인 집단이 되었을 때 개개인의 도덕성이 반드시 집단의 도덕성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성숙한 행동 양식을 보이는 학생 집단'은 공동체의 문화적 현상으로 해석하는 편이 옳아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자율성에 대한 존중에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 축제를 맞아 멋지게 단장한 학교에 출근하다가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학교 중앙 현관 계단 한 쪽 난간에 머리띠가 여러 개 걸려 있고, 그 위에 학생이 쓴 것으로 짐작되는 안내문이 게시되어 있었다.
문구를 보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문구가 학교의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가져가지 말아달라"는 문구를 붙이면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임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게시물을 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축제를 위해 마련한 소중한 소품을, 유동 인구가 가장 많아 손을 타기도 가장 쉬운 위치에 놔두고 하교할 수 있었다.
실제로 머리띠를 가져가거나, 안내문이 낙서 등으로 훼손되는 일은 축제가 종료된 이후인 지금까지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처럼 신뢰는 피차의 행동에 자율성을 더하고, 바람직하고 안전한 문화를 형성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상호 신뢰라는 삶의 중요한 가치를 경험으로 학습하게 된다.
축제 준비 단계에서, 일회용기를 사용하지 않는 축제를 기획해 보자는 논의가 나왔다. 용기를 집에서 준비해오지 않은 학생들에 대해 가사실에서 다회용기를 대여해 주고, 동아리 부스에서 음식을 먹은 후 깨끗하게 세척하여 반납하도록 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걱정이 되었던 것 중 하나는, 다회용기를 가사실이 아닌 화장실 세면대에서 세척하여 하수구가 막혀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세면대 앞에 감시하는 인력을 배치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각 층 화장실 세면대 앞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부착해 놓았다.
자율적으로 규칙을 지켜줄 것을 신뢰하고 있음을 알리며, 협조를 요청하는 문구였다.
축제가 종료된 후 화장실에 들렀을 때 오뎅이 한 조각, 파 한 조각이 발견되긴 했으나 세면대가 대체로 정말 깨끗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신뢰를 받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대다수의 아이들이 신뢰할 만하게 행동하였다. 평소와 달리 규율이 느슨해지고 모두가 어느 정도 흐트러지는 것이 제법 용인되는 축제의 현장에서도 말이다.
학교는,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는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곳.
내가 약속을 지키듯 타인도 약속을 지킬 것이기에, 서로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곳.
서로의 자발적 의지에 대한 존중이 아름다운 문화를 형성해가는 곳.
자녀에게 화장실 앞에 벗어놓은 옷을 치우라고, 참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잔소리를 해댄 것이 쪼끔 후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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