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릴케의 친절에 대하여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2. 19.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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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절에 대하여

 
매리언 울프는 <다시, 책으로>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어린 시절 읽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제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크게 감동한 것은 그의 편지글에 담긴 시적 언어가 아니라, 그가 한 인간에게 보여준 더없는 친절이었습니다.

 
 
 
이처럼 친절은 오랜 여운과 감동을 남긴다.
 
 
 
친절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출처: pixabay

 
 
 
 
 
 

#2. 강요할 수 없는 친절

 
며칠 전 동료들과 함께 근처 커피전문점에 들렀다.
 

말차라떼 라지 사이즈 주세요,

 
하는 내 말에
 

저희 매장에는 라지사이즈는 없습니다.
숏, 톨, 그란데 사이즈가 있으니 다시 말씀해주세요.

 
 
 
하는 냉랭한 응답이 돌아왔다.
 
아뿔싸, 나를 뒤이어 주문한 동료도 실수로 
 
 

라지 사이즈요,




해버렸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로 시작하는, 동일한 내용인데 한층 날이 선 면박을 받았다.
 
 
가장 바쁠 점식 식사 직후 시간이었고, 열 명 남짓한 단체 손님을 받은 직후였기에 해당 직원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있을 것이 이해가 되었기에, 나도
 
 

(톨을 라지로 잘못 이야기했다는 것을)
알아들으셨잖아요.

 
 
 
라는 정도의 소극적인 응수만 하고, 소비자로서 겪은 마음의 불편에 대해 마음에서 치밀어오르는대로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를 멈추었다.
아, '두 잔이라고 방금 말씀드렸습니다.'라고도 했구나. 그래, 끝없이 친절하기 힘든 날이 있으니까.
 
 
 

출처: pixabay

 
 
 
 
 
 
 

#3. 친절이 아닌 친절

 
함께 근무하는 분의 고충을 덜어드릴 방법을, 그리고 모든 학교 구성원들의 필요가 조금 더 용이하게 충족될 방법을 고민하느라 오후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다.
 
교사로서 학생에 대한 나의 친절은 양질의 수업을 성심성의껏 준비하는 것이고, 동료로서 나의 친절은, 일을 조금이라도 더 손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가능한 지원을 하는 것일테니.
 
같은 내용의 문의를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받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안내문을 만들어 배포하자고 제안드렸다. 그리고 나는 기억하지 못할까봐 메모를 시작했다. 직접 안내문을 만들어드릴 요량으로.
 
무척 고마워 하셨다.
 
 
 
내가 베푼 친절에 대해 스스로를 대견해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문득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쩌다 보니 내가 해당 안내문을 모두 만들어 드리는 것으로 상황이 흘러갔던 것 같은데... 그 분의 업무에 대한 안내문까지 내가 다 만들어 드리는 게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였다.
 
 
 

출처: pixabay

 
 
 
적정선을 찾고 협상하고, 소통하는 것이 늘 중요하다. 내 모든 시간과 노력을 다 내어주다보면 내가 괴로워지고 나의 안위가 위협 받는 상황이 올 수도 있고, (그럴 수도, 그럴 일도 없지만) 내가 모든 일을 다 해버려서 그 분의 업무가 없어지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친절하지 않은 일이니까.
 
나는 간이라도 다 빼줄 듯이 이야기하고 나서 늘 뒤늦게야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착하다기보다 머리가...)
 
 
 
 
 
 
 
 

#4. 다시 릴케의 친절로

 
다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친절로 돌아가 본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보내주신 편지는 바로 2,3일 전에 받았습니다. 저에게 보내주신 깊은 신뢰감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입니다. 지금 당장 당신의 시풍 詩風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중략) 그리고 어느 무엇보다도 말로써 다 할 수 없는 것이 예술 작품입니다. (중략) 당신의 시에는 독자성이 없지만, 개성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은밀한 소질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가장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의 영혼>이라는 마지막 시입니다. (중략) 그리고 <레오파르디에게>라는 아름다운 시에는 이 위대하고 고독한 시인과의 어떤 친근성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출처: 교보문고 인터넷서점

 
 
 
릴케는 자신의 시에 대한 평을 바라는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에게, 그의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구체적이고도 따스한 어투로 들려줌으로써, 카푸스가 시인으로서 성장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예술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다음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 릴케는 후배 시인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처음에는 너무나 잘 알려진 평범한 형식은 피하십시오. 이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훌륭하고 부분적으로 매우 뛰어난 작품이 옛날부터 많이 있는 곳에서 독자적인 것을 만들어내려면, 위대하고 성숙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주제는 피하고, 당신 자신의 일상생활이 제공하는 주제로 달아나십시오.

 
 
 
리더로서, 실패의 확률을 줄일 방안을 명확히 알려준 것이다.
 
하지만 카푸스를 위해 시를 대신 써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친절이 아니기 때문에.
 
 
 
 
 
 

#5. 결론

 
1. 타인에게 친절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친절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2. 그리고 친절이 아닌 것을 가려낸 후에는, 다시금 친절하기로 마음먹어야 한다.
 
 
내 삶에 주어진 모든 친절에 대하여 감사한다. 이 순간 내가 살아 있게 한 원동력이니까.
 
 
 
나와 연결된 세상을 친절로 밝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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