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내가 왜 글을 쓰는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오늘도 몇 자 끄적거려 본다.
1. 지적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서
나는 말주변이 없다. 뭔가 말하려면 일단 긴장도가 높아 버퍼링이 걸리고, 어떤 주제 분야에 대해 제법 통달해 알고 있는 바도 별로 없어 말을 잘 이어가지도 못한다. 그런데 글은, 말이 어눌한 내게는 아주 고마운(!) 말하기 대본이 되어주기 때문에 그나마 자신감 있게, 그리고 조금은 더 논리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글을 쓰며 깨닫고 또 깨닫는 것은 '내가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없는가'하는 것이다. 각종 자료나 책을 뒤적이면서, 글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는 공부를 하게 된다.
21세기의 문맹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학습, 탈학습, 재학습을 못 하는 사람이다.
- 앨빈 토플러
배우고, 옛 지식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다시 배우라는 앨빈 토플러의 격언처럼, 나도 문맹을 벗어나, 나의 동료들과 수돗가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은 소망이 있다. :)
2. 치유와 성찰이 나를 보호해주니까
마음에 드리운 먹구름을 가만히,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왜 이렇게 스스로가 밉거나, 화가 나거나, 아니면 슬픈지가 보인다. 그리고 언어로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나는 감정적 해소를 느끼기도 하고, 해결방안을 찾기도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거나 다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내 스스로를 견딜 힘이 조금, 혹은 대체로(다행히도!) 많이 생긴다. 그리고 이전의 다짐들을 이따금씩 들추어 보며, 부끄러워 마음을 고쳐먹거나 또 새로운 지향점들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다. 기록은 힘이 있다.
3. 글쓰기를 가르쳐야 하니까
오늘 발레 수업을 들으면서 이것은 정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된 내용인데, 교수자의 역량은 정말 중요하다. 발레 수강생이 두 배 이상 늘어난 이유는, 선생님이 출중한 발레 실력뿐만 아니라 '발레 동작을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방안에 대한 적.실.한 피드백'을 제공해주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쿠페 동작을 가르칠 때 그냥 '발끝을 펴세요'가 아닌 '발끝으로 바닥을 쳐서 튕겨 올린다는 느낌으로 발끝을 펴세요'라고 상세하게 코칭을 해주신다.
글쓰기를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면서 학습자가 단계별로 봉착할 수 있는 어려움을 몸소 파악해야 하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래야 적절한 피드백을 적기에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움을 제공해주는 대신 '너는 몇 점', '이건 몇 점' 하는 평가만 하게 되기 쉽다.
뭐, 무라카미 하루키님 말처럼 마라토너들이 근력 훈련하듯 나도 꾸준히 쓰다가... 좀 잘 쓰게 되면 내 이름으로 책이라도 한 권 낼 수 있으면 더 좋구. 아니어도 뭐, 글쓰는 과정 자체가 힘겨운 즐거움이니까.
의뭉스럽고 치사하게 앞에서 못 하는 이야기들을 뒷담화 하듯 펼쳐내는 글은 정말 쓰지 말자.
나의 못다 한 말들과 생각의 기록들이, 표현의 욕구가, 세상을 조금은 밝힐 수 있기를.
내 삶이 그렇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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