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는 대상에 대한 타자의 인식, 염원과 기대가 담겨 있다.
이름은 대상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이름은 중요하다.
교사가 학생을 불러주는 방식, 다시 말해 학생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방식이,
교사와 학생의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수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다음은 내가 학생들에게 이름을 붙여준 몇 가지 방식이다.
#1. 창의적인 아이
상자 안에 그림으로 자신의 강점을 나타낸 후 글로 표현하는 활동에서 상자 전체를 축구장으로 삼아 선과 원을 그려 넣다가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멈칫하던, 소리 내어 읽기나 작문하기 활동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곤 하던 학생에게,
"(칸 자체를 그림의 일부로 활용하다니) 창의적이구나."
학생은 휴대폰을 꺼내들더니 열심히 영어사전을 검색해 가며 평소보다 좀 더 의욕적인 모습으로 영어 작문을 시작했다.
#2. 생각의 속도가 빠른 아이
자신의 특성에 대해 작문하는 활동에서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빠르게 작성하여 검사를 받으러 나온 학생에게,
"생각의 속도가 빠르구나."
다음번에 학생이 영작하다가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미를 보일 때 얼른 다가가서는 이렇게 말해주면 된다.
"(생각 유창성이 뛰어난 데다가) 고쳐쓰기까지 하니 글이 더 좋아지겠구나."
#3. 신중한 아이
오래도록 아무 것도 쓰지 못하고 있는 학생에게,
"신중한 편이구나. (영어실력이 떨어져서라기보다는) 주제 자체가 생소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조금은 더 용기를 내볼 수도 있게 되기를, 혹은 자신의 탐탁치 않은 결과물에 조금 덜 실망하기를 바라본다.
#4. 중요한 특질을 지닌 아이
자신이 볼 때 형편없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모습일지라도, 타인이 참 괜찮다고 볼 수도 있을 자신의 특성에 대해 기술하는 활동에서, 도무지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발견해 내지를 못해 아마 친구에게 물었던 것 같은데, "넌 듬직해."라는, 약간은 무신경하고 약간은 장난기에 가까운 생기를 담고 있기도 한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몰라하던, 체격이 좋은 편인 여학생 옆을 지나가며,
"참 중요한 특질을 지녔구나."
너무 과장되게 말하거나 두둔해주는 듯한 말을 하여, 체격이 듬직하다는 사실을 오히려 확증해 주게 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매우 유의하면서 진심을 담아, 동시에 일부러 조금은 무신경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5. 매너 있을 아이
친구가 발표하는 중인데 짝궁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학생에게 다가가 "친구가 발표 중인데?"라고 지적하면 학생들이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때,
"제가 아닌 발표 중인 친구에게 미안한 일입니다. 매너 좀."
선생님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교사가 아닌, 또래 친구에 대한 존중심을 잃지 말아 달라는 호소는, 호르몬으로 인한 반항심을 부추기지 않을 수 있다.
#6. 회장님이 될 아이
선생님과 기싸움을 하느라고 아주 삐딱하고 거만한 태도로 앉아 있는 학생에게,
"어유, 우리 00는 회장님 포스네."
학생은 피식 웃으며 대개는 자세를 조금은 고쳐 앉는 시늉을 한다. 과업을 설명하거나 어떤 요청을 할 때 '회장님'하고 두어 번 더 불러주면, 학생은 교사와 파워게임을 시도할 동기를 잃게 된다. 서로 다른 학생에게 서너 번 정도 써먹어 본 수법인데 백전백승이었다. (단, 빈정거리는 투로 이야기해서는 절대 절대 절대 안 된다.)
#7. 예술적인 아이, 선도적인 아이, 아픈 것이 아니어서 다행인 아이
설명이 이어지는 중 낙서를 하고 있는 학생에게 집중하라고 혼내는 대신, "예술혼은 다음에 발휘할까요?"
아직 진도 나가지도 않은 부분에 대해 의기양양하게 질문을 하는 학생에게 무례함을 지적하는 대신, "앞서 나가는 훌륭한 학생이군요."
수업 시작부터 엎드려 있는 학생에게 일어나라고 호통치는 대신, "아픈 건 아니니?" 혹은 "피곤한가 보구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잠깐,
학생을 조련(?!)하자는 게 아니다.
학생의 마음이 다치지[닫히지] 않기를,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그저, 바라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는 방식만큼, 이름을 불러주는 방식도 중요하다.
좋은 이름들을 따뜻하게 불러주는 교실이, 가정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업 준비도 시험 출제도 도통 못 하고 있는 교사의 뇌피셜과 정신 승리 (29) | 2024.03.31 |
---|---|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7 - 학습력 제고 (44) | 2024.03.30 |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6 - 엄밀함의 추구 (32) | 2024.03.19 |
인공지능 기반 글쓰기 도구 '자작자작' 사용 후기 (38) | 2024.03.14 |
어그러진 보도블럭 문양을 통해 고찰해본, 책임감의 중요성 (51) | 2024.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