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종료령이 울리자마자, 각 학급의 학생들은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시험이 많이 어렵게 느껴졌다는 뜻이었다. '시험 범위도 적은데 어법 문제도 안 내면 도대체 낼 문제가 없지 않나요?' 하던 아이들이 벌떼처럼 달려와서 '선생님 문제가 왜 이렇게 어려워요?' 하며 혀를 내둘렀다. 베베 꼬인 '이상한' 문제를 접한 때의 짜증이나 불쾌감과는 다른, 진지하게 충격을 받은 모습들이었다.
가능성 #1 - 학습자 수준에 대한 판단 착오
점수를 보니 평균이 작년에 비해 10점 가량 낮았다. 이것이 학생들의 수준이 작년에 비해 더 낮다는 것을 꼭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다. 작년 중간평가에 비해 문항을 풀기 위해 요구되는 지적 수준이 더 높아졌고, 이것이 평균 점수 하락에 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물론 학생들의 영어 실력 및 사고력에 대한 기대 수준이 지나치게 높았던 탓에 전반적인 학생들 수준을 잘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원인을 속단하기 전에 조금 더 면밀히 들여다보아야 할 지점이 좀 있는 것 같다.
가능성 #2 - 학습 방식의 문제점
나의 담당과목 시험을 실시하기 직전 자습 감독을 했다.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30명 가량 되는 학생 중 25명 이상이 학원에서 배부한 유인물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고, 학교에서 수업할 때 활용한 유인물을 보고 있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학원 발 유인물들은 대체로 본문 빈칸 메우기를 통한 본문 암기 여부나 기본적 이해를 확인하는 내용, 그리고 (심지어 한 문항도 출제하지 않는다고 공언한) 어법 문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 시험 문항들은 수업 시간에 학습한 탐구 내용의 심화 버전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출제자의 입장에서는 시험 전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정말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학습에 대하여
맹세코, 일부러 베베 꼬아 출제한 문항은 없었다. 어휘 수준도 본문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문항의 저작권은 학교에 있기에, 발문만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윗글 (A)의 미국 대학생들이 윗글 (B)의 의견에 반박하는 말로 적절하지 않은 것을 두 개 고르면?
- 다음 글이 전제하고 있는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전제: 기초가 되는 판단
- 밑줄 친 부분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비판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다음 (A), (B) 두 글을 읽고 청소년이 얻을 수 있는 교훈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적용하고, 추론하고, 평가하는, 고차원적 사고력을 요하는 평가문항들이었고, 이는 분명 다음과 같은 학습지를 따라 친구와 함께 탐구했던 내용 등 수업 시간에 다룬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문제는 생각의 방향이었고, 사고의 깊이였다.
학생들은 지문을 달달 외우는 데 치중할 것이 아니라, 수업 시간에 다룬 내용에 대한 심화 학습을 했어야 했다.
게리 라슨(Gary Larson)의 만화 <저편(Far Side)>에서 눈이 왕방울만 한 학생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오스본 선생님, 머릿속이 꽉 차서 빈 공간이 없어요!" 기계적인 반복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면 이 말대로 금방 머릿속이 꽉 차서 더 이상 무언가를 담아둘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교화(elaboration)를 연습한다면 배울 수 있는 분량에는 사실상 제한이 없다.
- 헨리 뢰디거 외,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중에서
분량이나 범위가 많고 넓지 않아도, 얼마든지 깊이 있게, 더 정교하게 탐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이 이런 탐구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집중력을, 본문을 좀 더 달달 외우는 데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데 있다.
그 학생은 강의에 모두 출석하고 필기도 열심히 했다. 교재도 읽고 중요한 부분에 강조 표시도 했다. (중략) 그런데 어떻게 시험에서 D를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각 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핵심 개념들을 이용해서 자체적으로 시험을 보았는가? '조건 자극'과 같은 개념을 정의하고, 문단 안에서 활용할 수 있었는가? 교재와 필기를 읽으면서 핵심 내용을 질문으로 바꾸고 나중에 공부하면서 그 질문에 답하려고 해 보았는가? 최소한 중심 내용을 자기만의 언어로 바꾸어 읽어본 적이 있는가? 배운 내용을 사전 지식과 연관 지으려고 했는가? 교재 밖에서 사례를 찾아보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아니요'였다.
- 헨리 뢰디거 외,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중에서
학생들에게 묻는다.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떻게 배움을 설계할 것인가?
또 묻는다. 배움을 설계할 수 있도록 어떻게 배움을 지속할 것인가?
그나저나, 대다수의 아이들에게 패배감을 안겨줬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한 성찰과 대안이 필요하다.
한편, 요 녀석들이 단락 글쓰기는 제법 잘들 썼다. 작년 1학년 중간평가 때보다 글의 완성도가 눈에 띄게 높아진 듯한데, 다음에 좀 더 분석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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