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절할 용기
펄롱은 친절한 사람이다.
- p. 56 "틀리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당신은 속이 물러. 그래서 그래. 주머니에 잔돈이라도 생기면 다 나눠주고―"
- p. 86 "너희 헌금함에 넣을 잔돈 있니?" 예배당 마당에 들어설 때 아일린이 딸들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아니면 너희 아빠가 다 누구 줘버렸나?"
- p.102 "오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안 부치고 가지고 있었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아저씨는 신사래요."
펄롱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친절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때 괴로움을 느끼며, 일신의 안락함을 등지고서라도 옳다고 믿는 선택을 할 때, 마주할 현실에 대한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 p.99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 p.119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p.120~121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중략)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중략)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펄롱은 친절을 선택할 용기를 지닌 사람이다.
2. 친절을 낳는 친절들
펄롱의 친절에의 용기는 타인의 친절에서 비롯되었다.
2.1. 네드의 친절
- p.111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 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네드는 자신이 아버지이면서도, 펄롱이 농장일꾼의 자식이 아닌 양반가 자제의 후손일 거라 믿도록 만들고 펄롱을 곁에서 도와준다. 꼭 이런 방법만이 '친절'이라는 용어로 불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네드가 선택한 방법이었고, 펄롱은 이를 '은총'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2.2. 미시즈 윌슨의 친절
좀 더 근본적으로, 펄롱이 펄롱일 수 있었던 데에는 미시즈 윌슨의 친절이 있었다.
미시즈 윌슨은 펄롱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출산하도록 데려다 주고, 미혼모와 혼외자를 수녀원에 보내버리는 대신 하루하루 배불리 먹으며 살아갈 따뜻한 지붕을 허락해 준다.
미시즈 윌슨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꾼에게도 친절을 베푼다.
- p. 94 그 짓을 꽤 오래 계속하다가 어느 날에 그 길로 가는데 사람이 아닌 뭔가가, 손이 없는 뭔가 흉측한 게 도랑에서 나와서 날 막아섰어. 그 뒤로는 미시즈 윌슨의 건초를 훔치지 않았지. 지금은 그 일을 생각하면 너무 후회돼.
건초가 계속해서 없어지는 것을 파악한 미시즈 윌슨이[혹은 미시즈 윌슨이 시킨 누군가가], '손을 뻗어' 도둑을 잡는 대신 그저 막아섬으로써 나쁜 행위를 멈추도록 한 것은, 스스로 돌이킬 능력을 잃은 일꾼에 대한 미시즈 윌슨의 점잖은 배려요 친절이었다.
하지만 미시즈 윌슨은 마냥 친절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친절을 보인다.
- p. 30 펄롱은 자기가 어렸을 때 최대한 정성을 들여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빠나 아니면 농장이 그려진 500피스짜리 지그소 퍼즐을 받고 싶다고 편지를 썼던 일을 씁쓸하게 떠올렸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미시즈 윌슨이 가끔 같이 쓸 수 있게 해주는 거실로 내려가 보니, 벌써 난롯불이 타고 있고 트리 아래 똑같은 녹색 종이로 싼 선물 꾸러미 세 개가 있었다. (중략) 미시즈 윌슨은 펄롱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선물했다. 딱딱한 붉은색 표지에 그림은 없고 곰팡 냄새가 나는 낡은 책이었다. 그때 펄롱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려고 밖으로 나가 외양간으로 가서 울었다. 산타도 아버지도 오지 않았다.
미시즈 윌슨은 펄롱이 원하는 선물을 주기를 거절한다. 하지만 그녀가 어린 펄롱이 원하는 대로 마치 '직소 퍼즐을 맞추듯' 펄롱의 아빠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더라면, 펄롱이나 펄롱의 어머니의 삶은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었다. 반면 일개 가사 일꾼의 자식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의 불명예의 가능성을 상상할 여지를 없애버리는 대신, 상상을 통한 위안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것이 어쩌면, 미시즈 윌슨이 펄롱에게 베푼 가장 마음 따뜻한 친절, 혹은 '크리스마스 선물'인지도 모른다.
- p.120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수녀원)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p. 17 집안 사람들끼리 종교 때문에 충돌하는 일도 없었는데 양쪽 다 신앙심이 미적지근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시즈 윌슨에 대한 위의 묘사와는 달리, 신실한 신앙심을 지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앙심이 좋은 사람들이 우월하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착한 행실을 몸과 마음에 장착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사소한 친절이 때로 사소하지 않은 친절을 낳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소한 친절은 사소하지 않다.
내가 받아온 친절로 인해 친절을 선택할, 지혜와 용기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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