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33장부터 36장에서 멜빌의 시선은 작살잡이장, 선실의 식탁, 돛대 꼭대기, 뒤쪽 갑판 등 배의 다양한 장소 및 각 장소에 있는 인생들에 머문다. 에이해브 선장이 있는 뒤쪽 갑판에서부터는 저물녘, 황혼, 첫 번째 야간 당번, 한밤중과 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 사회를 고찰한다. 해당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강자는 낮의 시간을 점유하고 분노를 숨김없이 표현하며, 약자는 밤의 시간으로 내몰리고 웃는 얼굴을 한다는 것이다.
1. 강자
1.1. 낮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강자
아침 식사를 마친 이후부터 해가 저물기까지, 에이해브는 끊임없이 거닐며, 자신의 생각에 몰두한다.
- p.273 그런 데다가 밭도랑처럼 주름진 이마를 눈여겨봤다면 거기에서는 더 이상한 발자국, 쉼 없이 거니는 상념의 발자국을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 P.274 에이해브는 선실에 틀어박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전히 결의에 찬 외골수 같은 표정으로 또다시 갑판을 거닐었다.
권한을 지닌 존재가 낮의 갑판을 점유하면, 약자는 속삭이고, 흠칫 놀라며, 바라본다(274).
1.2. 분노하는 강자
강자는 자신의 충동과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를 제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p. 274 '전원 고물에 집합시켜.‘ 에이해브가 다시 말했다. ’거기 돛대 꼭대기! 내려와!‘
- p.277 그는 마치 심장을 찔린 사슴마냥 큰 소리로 짐승처럼 소름 끼치게 울부짖었다. ‘그래, 맞아! 나를 파괴하고, 나를 죽는 날까지 의족에 의존해야 하는 불쌍하고 한심한 놈으로 만든 게 바로 그 빌어먹을 흰 고래다!’
1.3. 게임을 주도하는 강자
강자는 게임을 주도한다.
- p. 276 누구든 이마에 주름이 지고 아가리가 비뚤어진 흰머리 고래를 발견하면, 누구든 오른쪽 꼬리에 구멍 세 개가 뚫린 흰머리 고래를 발견해서 내게 알린다면, 그에게 이 금화를 주겠다!
게임을 시작할 권한도, 규칙을 정할 권한도, 마칠 권한도, 강자에게 있다.
2. 약자
2.1. 이름 붙여지는 약자
- p. 274 '전원 고물에 집합시켜.‘ 에이해브가 다시 말했다. ’거기 돛대 꼭대기! 내려와!‘
에이해브가 ‘돛대 꼭대기’라고 부르든, ‘오줌싸개’라고 부르든 약자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약자에게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과 속성을 드러내 주장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2.2. 호응하는 약자
- p. 275 '고래를 보면 어떻게 하나, 제군?‘
’소리쳐 외칩니다!‘ 스무 명 정도가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중략)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나?‘
’보트를 내리고 쫓아갑니다!‘
’그리고 어떤 구령에 맞춰 노를 젓지?‘
’고래를 잡든가, 뒤집어지든가!‘
선원들이 외칠 때마다 영감의 얼굴에는 점점 더 야릇하고 격정적인 기쁨과 흡족함이 어렸다.
- p.275 ‘스타벅, 거기 큰 망치 좀 주게.’
- p.278 '그리고 자네들이 이 배에 탄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대륙의 양쪽에서, 지구 구석구석에서, 그놈이 먹피를 뿜으며 지느러미가 다 빠지게 몸부림칠 때까지 추격하기 위해서다. 어떤가, 나와 힘을 합칠 텐가? 모두 용감해 보이는데.‘
’맞습니다! 맞습니다!‘
강자는 질문을 하고, 약자는 강자를 만족시키는 답변을 내놓는다.
강자는 요구하고, 약자는 호응한다.
집중하고, 두려워하며, 복종한다.
2.3. 밤의 시간으로 내몰리는 약자
- p. 288 좋든 싫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그에게 붙들어 맸고, 밧줄에 묶어서 끌고 가는데 그걸 자를 칼이 나에겐 없다. (중략) 그는 위의 존재들을 상대할 땐 민주주의자인데, 아랫사람에게는 군주처럼 군림한다!
날이 저물면, 약자는 강자의 시간 동안 받은 고통을 찬찬히 몇 번이고 곱씹는다.
- p.289 앞에서는 흥청거리는데, 뒤쪽은 완전한 적막이군! 인생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 같구나.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를 맨 앞에서 뚫고 나가는 뱃머리는 전투 준비를 갖추고 들떠서 까불어 대는데, 그 뒤로 배가 지나가며 일으킨 파도가 늑대 같은 물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고물의 선실 안에는 깊은 생각에 잠긴 에이해브가 있다.
- p.290 오 은혜로운 기운들이여, 부디 저를 저버리지 마시고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밤은 약자를 위한 슬픔의 시간이요, 절망 속 염원의 시간이다.
2.4. 웃는 얼굴을 하는 약자
약자는 웃는다. 불만과 분노를 표출할 권한과 자유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 p.291 하, 하, 하, 하! 에헴! 헛기침이나 하자! 그 후로 줄곧 생각해 봤는데 결국 하, 하로 귀결되더군. 왜냐고? 요상한 것들에 대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손쉬운 대답은 언제나 웃음이거든. (중략)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웃으며 견뎌 낼 거야. 모든 끔찍함 속에는 익살스러운 추파가 숨어 있으니까! 재미있는걸.
약자는 웃는다. 웃음이 아니고서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웃음은 생존 전략이다.
3. 법칙의 흔들림
이러한 힘의 역학관계가 적용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강자가 스스로의 힘과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때이다.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아니할 능력을 지녔으나 ’인간의 죄를 대속할 죄 없는 인간’으로서의 사역을 위해 예수는 초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능히 구원할 전지전능한 신의 아들이나,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받아들인다. 묵묵히, 인간 구원의 사역을 완성한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주기 위해 어미는 잠을 포기한다.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려, 어느 아비는 물살에 휩쓸렸다.
관리자가 권위의식을 내려 놓으면, 구성원들은 억눌림과 억지 웃음에서 해방된다.
양치질을 포기하면, 아이의 우울한 생각의 고리를 잠시나마 툭, 끊어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생명이 갉아먹히는 줄 알던 자리에서 타자의 생명이 주렁주렁 열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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