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획한 수업에 대해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 수업 이후 무언가 석연치 않았던 불편함의 정체를, 매리언 울프의 <책 읽는 뇌> 발췌독을 하며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 고민 지점과, 수업에서 부족하다고 보이는 2%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지요.
1. 수업의 흐름
1.1. 교과서 지문을 통한 문제의식 공유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그리고 열등감과 불안의 폭력적인 재현의 모습을 직시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를 글의 형태로 담아내도록 몇몇 장치를 선생님들과의 논의 끝에 마련하였습니다. 먼저 신체적 장애가 있어 미식축구 선수로서는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팀에서 사랑받는 존재인 주인공이, 경기 종료 직전 투입되어 극적인 득점을 해내는 교과서 본문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업을 함께 하는 영어과 선생님들의 문제 의식은 과연 이러한 공동체가 현실에서도 실현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고, 실은 정반대의 모습일 때가 더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1.2. 팝송을 통한 현실 자각
현실은 어떠한지 살펴보자며, 동료 선생님께서 제안해주신 팝송 <Jealousy, Jealousy>를 함께 배웠습니다.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지닌 타인을 부러워하고, 시샘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지요. 학생들이 엄청나게 몰입하더군요.
https://youtu.be/Z-9gQjUZMm0?si=aSkK6KspyvdHsBTV
1.3. 알랭 드 보통의 <불안> 함께 읽기와 수업에 대한 고민
본격적으로 우리들의 불안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알아보기 위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선정하여 몇 부분을 함께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팝송을 배우며 형성되었던 진지한 분위기가 차시를 거듭할 수록 점점 식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다음은 오늘 수업을 마친 몇몇 학생의 학습 일지입니다.
학생들의 학습일지를 보며 더더욱 깨닫는 것은, 학생들은 대체로 수업을 통해 영어능력의 향상을 경험했다고 답하였고, 선생님들과 함께 의도한 '타인에 대한 무례함, 혹은 오만함은 사실 열등감 혹은 불안함의 다른 모습이구나'하는 메시지에 대해 무언가 '느낀 바'가 있어 보이는 학생은 적었다는 점입니다. 학습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한 학생조차 다음과 같이 잘 이해가 안 간다고 응답하였거나, 학습 내용에 대해 '깨달았다'는 표현 대신 '알게 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네요.
어쩌면 학생들이 영어 의사소통 능력 함양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은, 어쩌면 교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닿지 않았거나 혹은 비난의 말로 받아들여져 결과적으로 방어적 태도, 혹은 약간의 반감을 형성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수업 태도도 그랬습니다. 타인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듯한 분위기가 대체로 형성되지 않은 학급의 경우 (어쩌면 자신의 관심사 밖의 일이었기에) 본문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자 많은 학생들이 조는 모습을 보인 한편, 타인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일이 잦았던 학급의 경우 학생들이 비웃음을 멈추었지만, 수업에 대한 반응도 멈추어 '경직된'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오늘, 힘겨운 수업을 이어가며 적잖은 당혹감을 느끼게 되었고요.
2. 수업이 원만하지 않았던 이유: 이야기의 부재
매리언 울프는 <책 읽는 뇌>에서, 동화를 많이 읽어준 그룹 아이들은 타인의 말과 글을 잘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고, 비유적 언어, 독해수준, 추론 능력의 유의미한 향상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억, 예측, 추론 다음에 오는 "타인의 감정을 느끼고 이입하는 능력"이 독서를 통해 길러진다고 논증합니다. 즉, 이야기를 통해 접근하면 고등정신능력뿐만 아니라 '공감과 몰입'의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작년과 재작년에 (영문학 읽기에 대해 학습한 방법을 적용하여) R.J.Palacio의 <Wonder>를 가지고 깊이 있게 읽는 작업으로 일련의 수업-평가 과정을 시작했을 때에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반응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엄청나게 공감하며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졸거나 자는 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차별에 대한 비문학 지문을 다룰 때에도, 학생들의 몰입도가 오늘 수업에 비할 데 없이 높았습니다.
이야기가 학생들의 마음을 설득했던 것이지요...
3. 염려 섞인 전망 및 결론
(물론 팝송을 통해 문제의식을 공유하긴 했지만) 충분한 공감적 이해를 시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비문학 독해를 통해 사실적 논증을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학생들은 "예의 바르게" 혹은 "시험 점수를 위해" 수업에 따라와주기는 하였지만, '네가 타인을 비하하는 것은 네 열등감 때문이야'로 들려오는 정죄 혹은 꾸짖음의 목소리로 인해 주눅이 들거나 반감을 애써 누르고 있게 된다거나, 혹은 흥미가 도통 생기지 않아서 졸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논증은 폭력적 언행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할 수는 있겠지만, 이야기가 그러하듯 '깊은 깨달음'에서 기인하는 '지속적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야기로 시작된 에세이는 진솔한 다짐과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었지만, 비문학 텍스트를 통해 '머리로 하는' 학습에서 이어져 작성하게 되는 에세이는, 자칫 '기계적인 반성문(!)'에 그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아이들의, 그리고 한국 사회의 불안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밤입니다.
평안한 밤과 새날 맞이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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