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할머니들은
왜 이렇게 rude해(무례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카가 한국 방문 중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깔깔 웃으면서도 낯 뜨거웠던 적이 있습니다. 아니 동방예의지국에서 무례라뇨?
지하철을 탈 때 밀치고 먼저 타거나 뒷사람이 다가오는 중인데도 문을 잡아주지 않는 등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맞닥뜨리면서 느낀 좌절감의 표출이었다고 하네요.
그러고 보면 유모차를 밀던 시절 아무도 양보해주지 않아서 엘리베이터 줄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다거나, 쇼핑몰 등에서 앞사람이 통과한 뒤 훌렁 돌진해 오는 미닫이문에 황급히 손을 내밀었던 경험, 혹은 간혹 유모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문을 잡아주거나 엘리베이터 먼저 타라고 배려해 주시는 분들을 만나면 그토록 감격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문화에 익숙한 조카의 입장에서는, 다가오는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이 '당연한' 매너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당혹감과 분노를 느꼈나 봅니다.
우리는 '예의'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장면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예의를 지키도록 요구받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연배가 어리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 즉 약자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일부 집단의 ‘배려심 없음’의 문제로 치부해도 될는지요? 혹시 한국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고 따라서 나의 DNA에도 어느 정도 각인된 태도, 혹은 문화적 산물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운전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요즘은 운전을 되도록이면 안 하려고 노력합니다만, 저도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운전할 때면 옆 차가 갑자기 끼어들까 봐 앞으로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꾹꾹 눌러가며 주행을 합니다. 얌체 운전자가 깜빡이도 없이 끼어들기를 시도할 때면 하이빔을 쏩니다. '낯선 사람'을 대할 때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나라 상당수의 사람이 이런 운전자가 되어 보았거나 혹은 이러한 운전자를 목격한 경험이 있다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집단에 대한 일반화가 가능해지는 지점인 것이지요.

'약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직장의 부하직원이나 나이가 나보가 적은 사람 등 나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객관화가 쉬워질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에 어떤 연수를 진행하는 중에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어느 선생님께서 처음 보는 제게 계속해서 반말을 하셔서 속으로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던 일이 있습니다. 제가 지닌 피해의식이었는지도 몰라도, '네가 나를 가르치려 들어?'하는 말로 계속해서 들려와서 속이 상하더군요. 자녀를 대하는 저의 태도를 떠올리면, 방금 문장을 쓰던 순간의 억하심정이 순식간에 쪼그라듭니다.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순간 자녀를 향한 존중심은, 멍멍이에게나 줘버린 상태가 되니까요.
이러한 'rude한' 문화를 개선하고 진정한 '동방예의지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까요?
웃음
최근 M사 패딩이 당근 마켓에 많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코미디언 이수지 씨가 대치동 엄마들이 '교복처럼' 즐겨 입는 고급 패딩을 입고 자녀 학원 라이딩을 하는 모습이 이슈가 되면서, M사 패딩을 입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웃음'의 강력한 힘을 발견합니다. 풍자, 희화화를 통한 웃음은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드럽지만 날카롭게 꼬집어 냅니다. 이를 통해 자기 객관화를 돕고,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이수지 씨는 배변 훈련을 하는 시기의 어린 아이를 영어 학원에 보내고, 제기 차기와 같이 놀이를 통해 학습하는 것을 과외를 통해 익히도록 하는 한국의 기이한 교육열에 일침을 가한 것이지요.

(이미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예의범절을 강조하면서도 아주 많은 사람에게 아주 많은 경우 예의바르지 않은 우리들의 모습이 패러디를 통해 많이 그려지면 좋겠습니다. 많이 웃으면서 우리의 문화를 개선해갈 수 있도록이요. 한편 이러한 풍자가 가능해지려면 우리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 기본이겠네요.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 불이익을 받거나 심지어 신변의 위협을 받는 상태라면 우리는 마음껏 웃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문학 작품
시, 소설 등 문학 작품을 통해 타인에 대한 윤리를 깨닫는 것도 좋은 문화 형성에 무척 중요합니다. 다음은 신동호 씨의 <대통령의 독서>에서 발췌한, 소설 읽기의 유익에 대한 내용입니다.
소설은 비극으로 끝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위고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에도 개인이 바꿀 수 있는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중략) 한 영혼의 어둠을 다른 영혼의 광명이 감싸며 비로소 한 시대가 온전히 구성된다. 1874년에 출간된 소설을 아직까지 우리가 읽는 이유이다.
- 신동호 <대통령의 독서법> 205면에서 발췌
소설은 몽상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내가 타인에 대해, 이 시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혹은 내가 타인에게 아주 자주 무례히 행해왔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에밀리 A. 캐스파 박사의 <명령에 따랐을 뿐?!>에 따르면 자신이 저지른 어떤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면 같은 잘못을 반복할 확률이 낮아진다고 합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요.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문학을 권하는 것은 가치를 내면화하도록 교육하는 일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복되고 평안한 하루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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