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
며칠 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커피 전문점에서 베이글 샌드위치를 사먹었습니다.
매장 마감 시각까지 30분 밖에 남지 않았는데 괜찮겠냐고 점원 분께서 질문하셨습니다. 급해서 빨리 먹고 나갈 예정이어서 괜찮다고 답하고는 자리에 앉아 허겁지겁 샌드위치 반 조각을 씹는 둥 마는 둥 삼키고, 반 조각은 비닐째로 둘둘 말아 가방에 넣고, 쟁반을 반납하러 가는데 점원 분께서 다시 한 번 질문하셨지요.
물 한 잔 드릴까요?
저는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점원 분의 입장에서는 요청을 받지도 않았고, 자신의 의무도 아니며, 심지어 매장 마감을 앞두고 설거지 거리가 한 개 더 생기는 상황인데, 타인이 체할까 봐 염려가 되어 물을 한 잔 내민 것이잖아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또 다른 친절을 목격하였습니다.
지하철 환승 통로를 지나 계단을 오르다가, 계단 옆 벤치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어느 여자분이 벤치에 앉아 안정을 취하고 있고, 쓰러졌을 때 도움을 제공한 듯한 남자 분과 다른 분들이 곁에 서서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신고는 이미 이루어진 상태였고, 생명 징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여자 분께 이웃이 되어드린 분들께 저도 모르게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해버렸지요.
제가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그 분들께 감사를 표현하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저는 쓰러진 여자분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서, 신고를 하고, 구조대원이 도착하기까지 보살펴주는 행위를 (나를 대신하여) 이행하고 있는 이웃 덕분에 집으로 향할 수 있음에 감사를 느꼈습니다. 남자 분을 포함한 다른 분들도 무척 추운 날 피곤이 몰려오는 시각에, 위험에 처한 이웃을 위해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행위를 잠시 중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커피 전문점 점원 분이 제게 건넨 물잔과 남자 분의 여자 분에 대한 구조 행위를 동일한 범주의 '친절'로 인식하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길 한 가운데에 쓰러지더라도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서 그랬겠지요.
무엇보다, 저는 친절에 많이 목이 말랐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저를 성 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듯한 몇몇의 모습에 기운이 많이 빠져 있었거든요.(단순히 저의 느낌 혹은 피해의식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을 확률도 분명히 있고, 그러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다.) 게다가 제게 친절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누군가에 대해 친절할 수 없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이 어려웠고요. 심지어 친절하지 않은 적이 없는 누군가의 불친절을 상상하면서 한껏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으로 인해 크게 속이 상하기도 하더군요. (자세한 일화는 나누기가 적절하지 않게 여겨져 말장난을 하는 듯한 글에 사과드립니다.)
이렇듯 마음이 고단한데, 아직 나의 곁에 '이웃'이 있다는 사실에 저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칼레의 시민
백년 전쟁 당시 여섯 명만 골라서 죽이면 마을 전체 사람들을 살려주겠다는 에드워드 3세의 악랄한 명령에 나이 들고 약한 사람을 골라 죽인 다른 마을과는 달리, 프랑스 칼레 마을에서는 가장 유력하고, 가장 권위 있고, 가장 능력 있는 시민들이 죽음을 자청했다고 하네요. 서로 여섯 명에 들겠다고 우기다가 결론이 안 나오니, 다음 날 광장에 먼저 나오는 순서대로 죽음의 명단을 정하자고 시장이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시장은 광장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시장의 어머니가 나타나 시장이 지난 밤 자결했음을 알렸다고 하고요. 에드워드 3세는 차마 칼레의 나머지 영웅들을 죽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유래라고 하네요.

제가 일전에 만난 커피 전문점과, 지하철 역사의 이웃들은, 다시금 제게 칼레의 시민들과 같은 모습을 꿈꾸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함께 칼레의 시민의 용기를 갖자고 삶으로 설득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무엇 하나 진중하게 잘하는 게 없어 보이는 스스로의 모습에 마음이 어려웠지만, 글을 쓰며 감사를 되찾은 감사한 밤입니다.
평안한 밤과 기쁜 새 날 맞이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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