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동 대표님께서 대한민국의 경제 위기의 돌파구를 반도체 시장에서 찾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도 IT 강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국민으로서, 반도체 산업이 무궁히 발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중한 가치를 지향함에 있어서도 잊지 말고 지켜야 할 가치를 확인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준수하는 약속을 기반으로 멋진 일들을 이룩해 나가야겠지요.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기특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해도 도둑질이나 살인과 같은 범죄 행위를 용인할 수는 없으니까요.
권성동 대표님께서 반도체 분야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에 대해 주 52시간 근무제를 예외로 적용하는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반도체 전문 연구 인력의 근무 시간에 제한을 두는 나라가 없다고 주장을 하셨네요. 그런데 권성동 대표님의 "미국 엔비디아는 고강도 근무 문화로 유명하고, 대만 TSMC 역시 주 70시간 이상 일한다"는 주장과는 달리 프랑스·독일·대만·중국에서도 반도체 업종 고소득 전문직의 노동 시간에 대한 규제를 실시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일본이나 영국과 같이 노동 총량에 대한 규제가 없거나 예외를 허용하는 경우에도 추가 조치를 통해 근로자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합니다.
"반도체 주 52시간, 전 세계에 없다"는 권성동 말, 대체로 거짓 [오마이팩트]
"반도체 주52시간, 전세계에 없다"는 권성동 말, 대체로 거짓 [오마이팩트]
[곽우신 기자] ▲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 도중 헛기침을 하고 있다.ⓒ 남소연[검증 대상] "고소득 R&D 인력의 근무 시간을
v.daum.net
권성동 대표님은 경제 발전이라는 기치를 추구함에 있어 '거짓말'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셨군요. 그리고 기사를 통해 이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고요. 오늘은 '한국 문화를 꿈꾸다' 첫 번째 편으로, 우리 사회에서 유독 너그럽게 용인되는 '거짓말' 문화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거짓말에 너그러운 문화
미국에서는 거짓말쟁이라는 의미의 단어인 'liar'가 굉장한 모욕이라고 합니다. '거짓말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경계하고 정직을 중요한 미덕으로 삼는 것은 미국이 기독교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짓말에 너그럽습니다. 약속 장소에 나가고 싶지 않을 때 '아파서 못 간다고 해.'라고 말씀하시거나, 혹은 그러한 말을 전달해 보셨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많이 있습니다. '약속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말은 상대방에 대한 거절, 혹은 관계의 단절에 대한 선언으로 여겨질 수 있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합니다. 공동체와 '정(精)'이 중요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방과의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네가 싫은 게 아니고 다른 사정이 있어서 못 나가는 거야.'라고 설득을 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거짓말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가 '관계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활용해 왔으므로 타인의 거짓말에도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나라에서 '거짓말(lie)'은 '핑계(excuse)'와 비슷한 위상을 지닌 단어로 널리 통용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문화에 문제의식을 가집니다. 게다가 부모들의 '산타 할아버지 신화'나 '울면 안 돼'와 같은 동요가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용인하는 풍조를 조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시죠. 아동으로 하여금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순수한 동심을 지키고 보호하는 '미덕'인 반면, 산타 할아버지는 현존하지 않으며, 성탄 선물은 산타 할아버지가 아닌 부모가 주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은 곧 '동심을 파괴'하는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아이에 대한 '거짓말'을 정당화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거짓말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죠. 좋은 목적으로 행한 거짓말을 용인하는 부모로서, 학원비로 게임 아이템을 구매한 자녀를 혼낼 수 있을까요? 자녀의 입장에서는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한다는' 좋은 목적에서 한 '악의 없는 거짓말'일 텐데요?
게다가 동심을 지킨다는 명목의 거짓말은 아동에 대한 회유와 협박으로 이어집니다. 다음의 동요를 통해서요.
'울면 안 돼' 동요에 담긴 문화적 폭력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은 안 주신대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 가신대
한 소절씩 살펴보면서 동요의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 왜 울면 안 되나요? 우는 행위는 우리가 슬픔, 좌절, 분노, 그리고 감격과 기쁨을 느끼는 순간에 보이는 아주 자연스럽고 순수한 반응입니다. 울음을 억누르면 우리 아이들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아이들이 울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대신, 아이에게 '왜 우는지' 물어봐주는 것은 어떨까요? 이유 없이 우는 아이는 없거든요. 무엇이 슬픈지,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물어봐 주고, 이야기를 들어줍시다.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은 안 주신대
> 산타 할아버지는 현존하는 인물이 아니며, 따라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이러한 가상의 인물의 권위에 의존하여, 선물을 받고 싶으면 당장 울음(떼쓰기, 분노의 표현 등)을 그치고 부모의 말을 순순히 따르라고 아동을 회유합니다. 명백한 '공갈 협박'입니다.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 가신대
> 역시 거짓말입니다. 산타 할아버지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신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가사에서는 '우는 행동(떼쓰기로 울음의 이유를 한정해 봅시다)'이 '나쁜 행동'으로 규정되어 있네요. 이러한 규정을 적용하여 생각해보면, 도둑질하는 아이뿐만 아니라 '놀이터에서 친구와 조금 더 놀고 싶어서' 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쓰며 우는 아이도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됩니다. 행동에 대한 잘못된 규정이지요. 친구와 어울리고 싶은 상태를, '친구와 잘 지내라'라고 당부하던 부모가 갑자기 '나쁘다'라고 비난합니다. 아이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놀이터에서 우는 아이에게 '너 그러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신다' 해서는 안 되고, '지금은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가야 하는 거야'라고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요의 가사는 '행동을 비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심지어 '존재'를 부정합니다. 누군가를 '나쁜 애(사람)'라고 지칭하는 것은 '나쁜 행동을 하는 상태'를 너머 존재 자체를 '악한' 존재로 규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구와 놀고 싶은 것을 포함하여 다양한 욕구를 지닌 아이에게 '나쁜 애'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은 아동에게 부정적인 자아상을 심어주는 폭력입니다.
게다가 책 읽어야 할 시각에 책 읽고, 숙제해야 할 시각에 숙제 다 하고, 싫어하는 반찬도 먹고, 밤늦은 시각에 뛰지 않고,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고, 마트에서 물건 사달라고 조르면 안 되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되고', ...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한 기준은 왜 이렇게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중 무엇 하나라도 어기는 순간 아이의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너 이렇게 뛰면 산타 할아버지 선물 없다'라고 협박하는 대신, '네가 밤 늦은 시각에 뛰어놀아도 엄마는 너를 사랑하고 성탄 선물도 줄 테지만,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는 이웃은 잠들 수 없어 힘들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요. 네가 어떻게 해도 엄마의 사랑은 변함없다는 것을 알려주며 아이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이웃 사랑에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지요. '엄마도 연약한 사람이어서 맨날 실수를 해. 하지만 우리 다시 노력하자.'와 같이, 어른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아이의 동참을 유도하는 좋은 방법인 듯합니다. (선생님들께서는 '엄마'를 '선생님'으로 바꾸어 연습해 보세요. 아주 효과적인 학생 지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기준을 부과하여 정죄하지는 맙시다.
어떠셨나요? 일상적으로 부르고 있는 너무나 보편적인 동요 한 편을 통해 거짓과 협박 등 문화적 폭력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거짓과 협박을 동심을 지켜주기를 원하는 '부모의 따스한 사랑'으로 포장합니다. 거짓이 거짓으로 포장되어 있군요.
어린이집, 유치원 등 모든 교육기관과 가정에서 이 동요를 금지곡으로 지정하면 좋겠습니다. '산타 할아버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던 성 니콜라스를 기억하는 문화라고 아이들에게 솔직하고 따뜻하게 이야기를 들려 줍시다. 그리고 정직함이 우리 문화에 깃들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서로 신뢰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하는 사회를 꿈꿉니다.
권성동 대표님, 거짓말은 안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한일서 4장 1절 말씀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세한 눈을 기르는 수업 (25) | 2025.03.10 |
---|---|
한국 문화를 꿈꾸다 #2 - 실종된 예의범절, 그리고 웃음과 문학 (24) | 2025.02.28 |
친절을 통해 칼레의 시민을 양성할 수 있을까 (7) | 2025.02.21 |
휴머노이드 시대 - 로봇이 아닌 우리를 위해 친절을 가르칩니다 (4) | 2025.02.15 |
교사의 학생 살인 사건을 둘러싼 반응을 통해 생각해 보는 언론의 역할 (16) | 2025.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