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육방식에 대한 신뢰
우리 학교 영어 수업-평가에 대해 선배들이나 학원 선생님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학년 초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꽤나 여러 아이들에게 받았다.
"선생님이 작년 2학년 영어 가르친 선생님이세요?"
"저희도 에세이 쓰는 거 배워요?"
상당히 긴장한 모습들이었고, 긴장감과 함께 기대감도 엿볼 수 있었다.
작년 수업과 평가가 무척 '빡세'지만 유익하다는 평을 알음알음 듣고 온 학생들은 수업의 중요한 조력자요 지원자요 주인공이 되어 주었고, 학기초부터 학생들을 설득하느라 진을 빼는 지난한 작업 없이도 면학 분위기가 (모든 반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잘 조성되었다.
2. 시험문제 및 평가방식에 대한 신뢰
정기고사에서 문법 문항은 한 문항도 출제하지 않는다. 다만 정기고사 논술형 문항으로 출제하는 단락 글쓰기의 채점 기준에 정확한 언어표현을 사용하였는지가 포함되어 있고, 여기에도 10점 중 1점 정도의 점수만을 할애한다. 나머지 9점은 들어가야 할 내용이 들어가 있는지의 여부와, 글의 구조적 측면의 완성도가 갖추어지는 정도를 판단하여 득점을 한다.
따라서 수의 일치, 시제 일치 등 표현 하나하나의 중요성보다는 통사적 흐름이 중요하다는 것과, 생각을 잘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해야 함을, 그리고 세세한 표현에 약간의 오류가 있을지라도 내용과 구조를 어느 정도 갖추면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을 수 있음을, 다만 만점을 받기는 상당히 어려움을, 학생들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수업시간 학습 내용을 달달 암기해 작성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 수업 중 여러 생각 질문들을 통해 연습한 영작 내용을 두루 종합하여 서술해야만 하는 문항이 출제된다는 사실도 학생들은 안다.
게다가 논술형 문항 답안 작성 시간 확보를 위해 선다형 문항도 23문항 내외로 적다. 교과서와 학습지를 씹어먹을 정도로 달달 외워야 간신히 풀 수 있는, 구석진 곳에서 발굴하여 베베 꼬아 놓은 문항도 일절 없다. 오히려 수업 시간에 주요하게 다룬 내용에 대해 영어로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문항을 잘 맞추고, 전반적 영어 작문 실력을 키워 완성도 높은 글쓰기를 하는 일이 최고득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알고 있다.
따라서 시험 직전 (시험 문제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 교사를 은근슬쩍 떠보는 질문을 하는 학생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공부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불만은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두었던 시기 이후로는 나오지 않는다.
1학기 말, 00고 영어 시험 문제 좋다고 학원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더라는 얘기를 아이들에게 듣고 오신 선생님께서 기뻐하며 나에게 이야기를 전하셔서, 함께 기뻐 웃은 기억도 난다.
익숙한 어법 문제를 한 학기 내내 한 번도 출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평가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던 학생이 오히려 이번 시험을 앞두고는,
선생님, 이번에도 문법 문제는 안 나오죠?
라며, 뭐랄까, 안도하는(?) 눈빛으로 질문을 해왔다.
https://hn47749.tistory.com/51
1학년 영어 시험 감독을 하신 선생님께서 고사 종료령이 울린 직후 어느 학생이 다음과 같이 투덜거리더라는 이야기를 전하셨다.
세 번째 시험인데도 적응이 안 돼. 영어 시험은 영어 시험이 아니고 논술 시험이야.
하지만 나는 안다. 학원 가서 다른 학교 아이들 만나서는 영어 에세이로 수행평가 보고, 영어 단락 글쓰기 논술형 문제 푸는 교육을 받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이러한 평가 방식에 대한 신뢰는 추후 수업에 대한 신뢰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선순환의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3. 학생들의 신뢰에 부응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
그리고 교사는 학생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만큼, 수업과 평가에 대해 더욱 책임감을 지니게 된다.
내가 현재 가장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지점은 시험 문항 오류 및 정답 처리 과정에서 학생들과의 사이에서 쌓아 온 신뢰가 금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이다. (물론 금요일 내내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으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잘 준비하는 중이다.)
또한, 학생들이 나와 동료 선생님의 수업을 신뢰하고 있기에, 중간평가 이후에도 (1학기부터 기획해 온 내용에 대해) 좋은 수업을[교육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데 그 수업의 구체화 단계가 생각보다 어려워 큰 부담을 느낀다.
글을 맺으며
학교는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학교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에 해당하는 교육방식 및 평가방식에 대한 신뢰 구축은 공교육 정상화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교사가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교사가 신뢰를 받기 합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러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근무 여건을 조성하고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교육을 통해 좋은 인재들을 양성해 나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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