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감독을 하면서, 그리고 출제한 문항의 오류를 발견하고 한없이 마음이 쪼그라드는 경험을 하면서 서논술형 수능의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바를 적어보고자 한다.
1. 부정 행위의 소지가 적어진다
선다형 문항과 단답형 위주의 서술형 문항으로 구성된 시험의 감독을 할 때, 감독은 학생들이 전체 문제지를 한 번씩은 모두 훑어보고 답안지를 작성하는 시간인 종료 전 10분 동안은 정말이지 초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부정 행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조금만 흐트러진 자세를 취해도 앞, 대각선, 옆 수험생의 답안지를 볼 수 있는데, 헷갈렸던 문항에 대해 다른 학생의 답과 자신의 답을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가 과연 쉬울까?
오늘도 10분을 남겨두고 OMR카드 작성을 시작하지 않은 학생은 없는지 한 바퀴 도는 동안, 어느 학생이 OMR 카드를 한껏 몸 옆으로 밀어두고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시험을 보는 통에 바로 뒤 학생이 답안지를 실컷 구경 및 참고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마음이 매우 어려웠다. 수험생을 잠재적 부정행위자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도덕성에 대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건 개인이나 집단의 도덕성의 문제로 국한하여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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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단답형이 아닌 서·논술형 문항으로만 이루어져 있거나, 비중이 제법 큰 서논술형 문항이 포함된 시험의 경우, 종료령이 울리기 전 10분은 수험생들에게 있어 자신의 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점검하고, 고쳐쓰고, 표현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는 초 집중 상태의 시간이다. 이것은 내가 동교과 선생님과의 협의를 통해 단락 단위의 글을 쓰는 논술형 문항을 정기고사에 도입하기 시작한 2022년 2학기부터 정기고사 때마다 관찰해왔고, 오늘도 어김없이 관찰한 사실이다.
마지막 10분 동안 바쁘지 않은 아이들이 분명 있긴 하다. 엎드려 있거나, 다른 학생의 연필과 지우개가 사정없이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는 이들은, (슬프지만) 대개 학습에 대한 열의가 높지 않은 학생들이다. (기초학력 향상 문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게다가 옆 수험생이 쓴 몇 단어, 혹은 두어 구절을 어쩌다가 보게 되었다 손 치더라도, 나름의 유기성과 통일성을 갖춘 글 전체를 베껴쓰는 것은 답안지를 맞바꾸지 않는 한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수능 고사장에서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온갖 반입 금지 물품과 깨알같은 글자로 적힌 수험생 응시 요령, 그리고 "잠재적 부정행위자"들의 행동 개시 예방을 위한 101가지 시험 감독 요령은, 서·논술형 문항과 함께 대폭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모든 수험생들은 각자의 글을 충실히 작성하느라 너무 바쁠 것이기 때문이다.
2. 문항 오류의 위험이 적어진다
나의 치부를 또 한 번 드러낼 순간이 왔다. 사실 이 자괴감에서 벗어나기가 한동안 어려웠다.
아버지 Roebling, 아들 Roebling, 아내 Roebling의 합작품인 브루클린 다리에 대한 단원을 배우고, 아들 Roebling의 리더십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학습 내용과 관련하여, 제시된 의견에 대해 가장 합리적인 반박을 제시한 의견을 고르는 선다형 문항을 출제했다. 그런데 아들 Roebling의 이름을 쓴다는 것을 그만 아버지 Roebling의 이름을 적어서, 정답이 정답이 아닌 문장이 되었고, 이를 시험 종료 이후에 발견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도대체 왜 시험을 치르는 중간에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아마 내가 찬양해 마지않는 논술형 문항 답안을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흑... 정말 똑땅하다.)
문항 오류를 시험 중간에 발견하여 공지를 하는 등 간단한 조치를 취하면 가장 이상적인데, 시험이 끝나고 나서 발견하는 경우 교과협의회 및 성적관리위원회 등 시험 문항 오류에 대한 제법 복잡다단한 절차를 거쳐 조치해야만 한다. 평가자로서 행사하는 평가권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지는 방식이니 이러한 절차에 대해 투덜거리기는 어렵다.
하여간 서·논술형 문항의 경우, 일단 문항의 개수가 선다형 문항으로만 구성된 고사원안을 출제할 때보다 현저히 적기에 문항 오류 발생 가능성 또한 현저히 낮아질 수밖에 없다. 선다형 문항에서 스물 여남은 개의 문항에 대해 각각 4개의 매력적인 오답을 실수 없이 만들어내는 일은 여간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교과 선생님들과 함께 여러 차례 점검을 하게 되어 있지만, 왜, 내로라하는 수재 집단이 몇 주씩 합숙하여 출제하는 수능 문항에도 오류가 종종 발생하지 않는가. 실수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도 그 실수를 했다. (어흑-)
게다가 시험 시행에 앞서 문항에 대한 모범 답안을 작성해보는 과정에서 발문이나 제시문, 제시된 조건 등의 사항을 재차 점검하게 되기 때문에 오류를 정정할 확률이 높아진다.
3.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부정 행위 예방 및 문항 오류 위험 감소라는 두 장점은 서·논술형 수능 도입의 부차적 소득이다. 가장 중요하고, 또 우리나라 교육계와 (좀 더 원대하게는) 우리 사회의 발전에 서·논술형 수능 도입을 통한 글쓰기 지도와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글쓰기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아주 강력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외운 자, 정답 찍는 도사, 문제 풀이 기계들이 어느 날 노벨상 후보 근처에라도 오르게 되는 일이야말로 기적적인 일이 아닐까.
글쓰기를 통한 사고력 신장은 정말 중대한 부분이기에 석학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추후 좀 더 정리해보려 한다.
4. 영어 교과의 경우 영어의사소통역량을 '효과적으로' 함양할 수 있다
문법 형식 지식을 바삭하게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학생들도 막상 영작문을 할 때 기본적 어법 실수를 많이
한다. 영어단어 수두룩 빽빽하게 외운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한두 마디 말을 영어로 표현하기 어려워 한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을 꺼내어 쓰는 훈련 과정을 거쳐야만 실제 영어의사소통 능력이 함양된다.
다음은 한 학기 동안 영어 에세이 쓰기 훈련을 받은 학생이 밝힌 소회이다.
영작을 위해 문법, 단어, 독해 등 내가 아는 것들을 전부 사용해 (영어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머리 속에 잠자고 있던 지식을 끄집어내는 것이 글쓰기 활동인 것이다.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생각을 잘 정리해 놓으면 논리적인 말하기 또한 가능해진다.
서·논술형 수능을 도입한다면 학교 교육 또한 쓰기 위주의 교육방식으로 변화할 것이고, 이는 자연히 학생들의 영어의사소통역량의 효과적 함양으로 이어질 것이다.
정리 및 결론
서·논술형 수능의 도입의 예상되는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부정 행위의 소지가 적어진다
2. 문항 오류의 위험이 적어진다
3.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
4. 영어교과의 교과 성취 기준인 영어의사소통역량을 '효과적으로' 함양할 수 있다
서·논술형 문항의 도입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과 해결방안에 대한 적극적 모색과 대비를 통해 이러한 글쓰기의 장점을 우리 교육계가 속히 흡수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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