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56 인간은 강렬한 감정에 휩싸였을 땐 하찮은 고민을 경멸하지만, 그 순간은 금세 지나간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본질적인 천성은 바로 천박함이라고, 에이해브는 생각했다. 흰 고래가 야만적인 선원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고 야만성을 자극해서 의협심까지 넉넉하게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오로지 좋아서 모비딕을 추격한다 하더라도, 좀 더 평범하고 일상적인 식욕을 만족시켜 줄 음식도 먹어야 했다. 옛날 숭고하고 기사도적이던 십자군들조차, 성전을 벌이기 위해 3천 킬로미터가 넘는 산천을 가로지르는 동안 강도질을 벌이고 남의 주머니를 털며 이런저런 부수입을 챙겼다. 그들을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목표에만 엄격하게 묶어 놓았다면, 바로 그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목표가 지긋지긋해져서 등을 돌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에게서 돈의 희망을 빼앗으면 안 된다고, 에이해브는 생각했다.
에이해브는 영리하다. 인간의 천박한 본성을 잘 알고,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좋은 음식도 부수입도 챙겨주며 자신의 목적 달성을 꾀한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타인의 심리를 이용하는 행위를 ‘영리함’으로 규정한다면, 공동[혹은 공공]의 유익을 위해 타인의 심리를 이용하는 행위를 ‘지혜로움’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리함과 지혜로움은 별반 다르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고, 경계가 모호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양쪽 모두에 해당할 수도 있다.
7~8년 전 일이다. 익명의 학부모 민원이 들어왔다며 교감 선생님께 불려 간 적이 있었다. 고3 학생들에게 연구조사 프로젝트니 뭐니 교사 개인의 연구를 위해 학생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주요 민원 사항이었다.
일단 나는 논문을 쓴다거나, 보고서를 쓰려는 목적에서 해당 수업을 진행하고 있지도, 해당 학년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느 학부모께서 누구의 어떤 이야기를 듣고 그런 민원을 제기하셨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아무쪼록 민원인의 입장에서 나는 영악한 교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1학년 학생들의 연구조사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이를 경험한 3학년 선배 중 자원 학생들이 멘토가 되어 주제 등 연구 개요에 대한 피드백을 주도록 하는 것은(수업 외 시간을 할애하였다) 1, 3학년 모두에게 아주 이상적인 학습 활동이자, 학생이 대학수학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었다는 확신이 있다. (실제로 연구조사 프로젝트에 대한 질문을 대학 면접 시 많이 받았다고, 학생들이 증언하였다.)
물론, 이러한 수업사례를 바탕으로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를 할 기회도 몇 차례 주어졌기에, 결과적으로 지혜로운 방법이자 동시에 영악한[교사 개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교수학습내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다 그런 것 같다. 에이해브의 통찰대로 인간은 천박하므로. 교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수업과 평가를 준비하지만, 적절한 보수나 대가(칭찬이나 인정과 같은 내적인 보상을 포함한다) 없이 열정 페이만 강요받는다면 그 열정과 사명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천박한 줄 알면서도 나는,
‘내년에 저희 또 가르쳐 주세요.’하는 말에 우쭐대는 마음을 갖고 싶기도 하고, 월급으로 예쁜 발레복을 구입할 계획도 세운다.
<인사이드 아웃 2>에서 어떤 장면이 가장 좋았느냐는 딸들의 질문에 나는 ‘기쁨도, 슬픔도, 버럭도, 불안도, 당황도, 모두 함께 자아 인식을 끌어안는 장면’이라고 답했다. 모두 나를 이루는 모습들인 것이다.
한편, 발렌시아가의 400만 원짜리 박스테이프 팔찌 이야기를 듣고, 이를 만든 디자이너의 내면에는 분명 인간의 천박성을 조롱 내지 희화화하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8만 원짜리를 300만 원에 기꺼이 사들이는 존재이니까.
https://v.daum.net/v/20240314084502088
얼마만큼의 천박성을 포용할 것이며 또 배격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야겠다.
한편,
댓글창에 반복되는 첫머리 글자들(천박성)의 폭격^^;이 힘겹게 느껴져, 이러한 시도가 나의 천박함을 조금도 감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제목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바꾸었다.
천박성에 대한 고찰 - 모비딕에서 발렌시아가까지
에서
모비딕에서 발렌시아가까지 - 천박성에 대한 고찰
로
달리 도리가 없어,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나는 또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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