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05 비교적 소수의 고래잡이만이 그 고래의 실체를 봤고, 실제로 맞서 싸운 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고래잡이 선박의 수가 워낙 많고 넓은 바다 전체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으며, 그중 많은 수가 외딴 해역에서 무모한 추격을 하느라 꼬박 1년이 넘도록 새 소식을 전해 들을 다른 선박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p.306 그렇게 참담하게 패퇴하는 경우가 반복되다 보니 모비 딕에 대한 공포는 점점 쌓이고 부풀려졌으며, 급기야 용맹한 고래잡이들의 귀에까지 흰 고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들의 용기마저 뒤흔들기에 이르렀다.
온갖 종류의 터무니없는 소문이 과장되었고, 고래와 사투를 벌인 실화는 더 끔찍하게 각색됐다.
p.307 그러니 드넓은 바다를 이리저리 흘러 다지며 몸집을 키우고 한껏 부풀려진 흰 고래의 소문이 급기야 온갖 섬뜩한 암시와 결합하여 초현실적인 요소를 잉태하고, 결국 모비 딕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공포감을 덮어씌우기에 이른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닐 터다.
p.308 아무튼 많은 포경선, 특히 미국 국적이 아닌 포경선의 선원들 중에는 향유 고래와 대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고 이 바다 괴물에 대해 아는 거라곤 북해에서 주로 출몰하는 고약한 괴물이라는 게 전부인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승강구 뚜껑에 앉아 마치 옛날 얘기를 듣는 화롯가의 아이들처럼 흥미롭고 두려운 마음으로 남양 고래잡이의 기이한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p.309 우연히 막연하고 어렴풋한 얘기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재난에 대해 자세히 듣지 못하고 거기 따라 붙는 미신을 모를 경우, 대결에 직면했을 때 달아나지 않을 사람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 (중략) 워낙 귀가 얇은 사람들이기도 했겠지만, 미신이나마 이런 망상에도 희미한 개연성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p.311 흰 고래가 대담한 공격을 받고도 번번이 살아서 도망쳤다는 걸 알게 된 고래잡이들이 미신에 더 깊숙이 빠져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모비 딕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공간을 초월하는 것도 모자라 불멸의 존재라 주장하고(불멸이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등에 꽂힌 창이 숲을 이룰 지경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헤엄쳐 사라질 수 있다거나, 실제로 피를 콸콸 쏟더라도 그 모습은 환영에 불과하며, 몇 킬로미터 떨어진 큰 파도 속에서 핏물이라고는 전혀 섞이지 않은 맑은 물을 뿜는 모비 딕을 다시 볼 수 있다고 믿는 식이었다.
숨이 정말 가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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