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논술형 백지 답안에서 시작된, 최소성취 수준 보장 지도에 대한 염려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10. 1.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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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논술형 문항 백지 답안에서 시작된 염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는 일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어 심란한 경험 있으신가요? 저는 지금이 그런 상태인 것 같습니다. 214명의 학생이 시험을 응시하였는데 그 중 자그마치 22.4%에 달하는 48명의 학생이 논술형 문항 0점을 받았거든요.

물론, 여기에는 한글로, 제시문의 두 집단의 공통점을 분석한 후 이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공동체적 이상향에 부합하는지 판단하고, 우리 학급을 더 이상적인 공동체로 만들기 위한 실천방안에 대한 아주 구체적이고도 멋진 단락을 구상한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어 논술은 0점이었지만 생각은 아주아주 훌륭한 친구들인 것이죠. (학생들의 소중한 지적 재산이므로 희미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채점기준표상으로는 0점인데, 정말 0점을 부여하는 게 맞을지는 짝꿍 선생님들과 의논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




또, 무언가 영작을 시도해보다가 자신이 없어 그냥 지워버리거나, 한 문장 미만의 글을 완성하여 0점을 받은 학생들도 몇몇 있었기에, 아예 손도 안 댄 백지 답안은 39명 정도였습니다. 8개 학급이니 한 학급당 평균 4명 가까운 학생들이 백지 답안을 제출하였네요.



저는 마음이 좀 어려워졌습니다.

무언가 주제와 영 관련 없는 글이라도 한두 줄 영작하면 점수를 조금이라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예 답안지에 획을 그을 마음의 힘이 없는 상태인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아서 말입니다. (선택형 중 고난도 문항을 풀다 보니 시간 관리에 실패해서 손을 대지 못한 학생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는 마음의 문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생각하고, 또 생각을 표현하면서 마음과 머리가 자라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선생님들과 함께 노력하고 있는데, 잘 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하고 마음이 좀 가라앉네요.

물론, 수업을 하면서 학생의 마음 속에 일어났을 크고 작은 변화가 논술형 답안 점수에 모두 담기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지요. (실적?성과?에 연연하고 있는 모습인지 어쩐지도 돌아봅니다.)







최소성취수준 보장 지도에 대한 염려


그러고 보면 내년부터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는 최소성취수준보장 지도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 몰려옵니다.

교과목별 획득 점수가 전체 점수의 40%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과목 출석률이 2/3 미만에 해당하는 학생의 경우 해당 과목 ‘미이수’ 처리를 하게 된다고 하거든요. 과목 담당 교사가 책임을 지고 수업 중 혹은 수업 외 시간을 활용하여 보충 지도를 하지 않으면 말이지요.

물론 교육 현장에서 책임을 지고 모든 학생들이 최소 성취 수준에 도달하도록 하자는 사업의 취지는 정말 좋습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나라의 너무 많은 학생들이 시험지에 쓰인 영어문장을 아무거나 베껴 쓸 의지조차 없을 정도로 학습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로는 학교 현장의 반발도 매우 심하고, 대체로 파행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기본 점수를 40점 가까이 부여하여 학생이 도달하도록 만든다기보다 도달의 기준을 아주 낮은 수준으로 조정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미세먼지 ‘나쁨’의 기준이 한 때 매우 헐거워졌던 기억이 나는군요.)

본질을 외면하면 이런 웃픈 결과가 나오게 마련이지요.



지금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집중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미도달 학생 수 줄이기 혹은 최소성취 수준 보충 지도 한 것처럼 서류 꾸미기에 급급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싶지는 않네요. 부디요.


평안한 밤과 기쁜 새날 맞이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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