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기

글을써보려는사람 2025. 2. 4.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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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전체주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시도합니다. 민족이나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개인을 억압하고 절대 권력을 강조하는 정치적 이념을 지칭하는 기존의 정의를 넘어, 근대의 과학 기술의 발전, 그리고 이로 인한 고향 상실, 인간의 '잉여'의 존재로의 전락과 같은 현상 자체가 일종의 인간 중심적인 전체주의에서 비롯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공지능 기술이 이끄는 화면 속 사이버 세계는 이러한 인간소외 현상의 궁극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뭘 해도 인간보다 나은 인공지능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 등 공포와 좌절을 경험하고, 인공지능과 소통하느라 바쁜 옆 사람으로부터도 우리는 소외되기도 합니다.
 
때때로 지하철 속 적막함을 인지한 적 있으신가요? 우리들은 어떤 대화도, 눈 마주침도 없이 사람들은 동행인이 아닌 각자의 화면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최근에는 책을 들고 다니는 분들이 간간이 보이더라고요. 한강 작가님 덕분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내린 결정들이 인간을 소외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박탈하는 현상을 낳았으니까요. 한나 아렌트는 이를 '근본악'이라고 부릅니다.
 
실로 우리 삶은 이런 모순과 고통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고, 모두에게 유익할 것 같고, 심지어 내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는 결정일 것 같은데, 필경 멸망의 길(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소외시키는...)인 경우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참으로 창조주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네요.
 
 


 
 
이러한 소외 현상에 대해 고찰하며 마음이 쓸쓸하다 보니, 최근 어느 강연에서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에 대해 듣고 감동한 기억이 납니다.
 
밀레는 한겨울에 이삭을 줍고 있는 여인들의 그림을 그리며, 그들의 빨갛게 부르튼 손을 주목하다는 점을 여인의 손을 표현한 물감 색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숨 쉴 때마다 하이얀 입김이 새어 나올 것만 같지요. 얼마나 춥고, 얼마나 쓰라릴까요. 그런데도 딸린 식솔을 생각하여 참으며 이삭 하나 더 주우려고 애쓰는 중인 모습이네요. 그러고 보니 왼쪽 파란 두건을 쓴 여인은 왼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있습니다. 묵직한 통증을 없애려 허리를 잠시 폈던가 봅니다. 그러다가 다시 '끙' 소리를 내며 몸을 기울여 이삭을 줍기 시작했겠네요. 오른쪽 여인은 이제껏 주운 이삭을 가지런히 정리하다가 떨어뜨린 이삭 한두 가닥이 어디로 갔나, 하고 찾는 중인 것일까요? 
 
 
 

© wikimedia commons

 
 
그림에 '사람'이 들어있는 것을 보니, 밀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잃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밀레의 눈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타인과의 연결성을 망각한 상태는 곧 자신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함으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외국 대학에서는 공감 능력 및 의사소통능력을 기르기 위해 표정 읽기 강좌를 진행한다는 내용을 최근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문헌을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따뜻하고 평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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