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학생들이 파김치처럼 풀이 많이 죽어있더라고요. 성실하고 예쁜 학생들이 2~30점대의 점수를 제법 받았거든요. 일단 선생님이 너무 미안하다, 사과했습니다.
약간의 뜸을 들인 후에, 질문을 던졌죠.
첫 번째 위로: 목표를 상기시켜주기
“여러분, 정확도 높게 번역해주는 거는 누가 다 해주죠?”
“...파파고요.”
“맞아요. 우리의 영어 공부의 목적이 정확한 암기나 이해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기계가 대체할 수 있는 일만 할 수 있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어를 가지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어야 해요.”
선생님의 의도가 학생들 기죽이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의 어깨가 아주 조금은 올라가더군요.
두 번째 위로: 복수(?)의 기회 주기
그리고 학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선생님에게 평가를 받다가 선생님을 평가하는 입장이 되어 보도록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평가 받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이번에는 여러분이 선생님의 글을 난도질할 기회를 드릴게요.
허걱, 난도질이라니. 교사가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용어치고 조금 자극적인가요? 저는 일부러 이 용어를 선택했습니다. 아이들 마음 속의 응어리들이, 그 속의 고름들이 터져 나오게 되었으면, 하고요.
우리 아이들 16년간 끊임없이 비교 당하고 평가 받으면서 사느라고 상처가 참 많잖아요.
실제로 학생들 눈빛에 호기심과 생기가 감돌더군요.
제가 여러분을 평가한 그 평가기준을 가지고 제 예시글을 평가해 보세요. 저도 글을 쓴 한참 후에 읽어보니, 아니 글쎄 어법 실수도 있고, 구성력 측면에서 잔소리 들을만한 부분도 있더라고요. 여러분 한 번 찾아보세요.
독자님들께서도 제 글의 실수 및 개선점을 한 번 찾아보세요.
물론, ‘복수의 기회’라고 명명하기는 했으나, 예시글을 분석해보는 활동은 글쓰기를 학습하는 학생들의 상위인지를 높일 수 있는 아주 좋은 학습 방법입니다. 정답은 잠시 후에 공개할게요.
세 번째 위로: 개별 피드백 제공하기
학생들이 제 글을 평가하는 동안 저는 한 명 한 명 학생들과 면담을 진행했습니다. 어디서 왜 점수가 깎였는지, 어떻게 하면 해당 영역의 점수를 올릴 수 있을지 학생 글을 살펴보며 함께 고민을 해보았지요. 지금 수준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도록 말이죠.
네 번째 위로: 전체 피드백 제공하기
그런 후에는 학생들이 평가한 제 글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one of the regretful moment가 아닌 moments라고 써야 어법상 맞다, 글의 구성력 측면에서는 첫 번째 근거가 두 번째 근거에 비해 조금 약하다는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등등 글의 개선점을 이야기하고, 구체적이고 상세한 예시를 제공한 점, 연결어의 사용 등 글의 장점에 대해서도 논의하며 글을 쓰는 방법을 한 번 더 알려주었습니다. 이어지는 수행평가도 잘 할 수 있게 되어야 하니까요.
인지적인 도움 및 발판을 친절하게 제공해 줌으로써, 작은 위로를 건네주고 싶었습니다.
아, 그런데 아직도 마음이 안 풀렸나 봐요. 아니면,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중간고사 직후에 수행평가까지 언급하니 갑자기 울컥했는가 봅니다. (너무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지는 말아 주세요. 어쩔 수 없는 교사의 역할입니다. 등 떠밀어 주기도 하고, 채찍질도 하고, 위로도 하고,...)
선생님, 00고 다니는 제 친구는요,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고 심지어 공부도 잘 해요.
다섯 번째 위로: 지적 허영심 부추기기
풀이 포옥 죽은 모습으로 한숨지으며 엄친아인 친구의 이야기를 해주는 모습에,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약간은 익살스럽고 약간은 허풍이 섞인 과장된 어조로 말했지요.
어디 걔보고 에세이 한 번 쓰라고 해 봐. 너네가 훨씬 잘 쓸 걸~?
학생들 얼굴에 배시시 웃음꽃이 피어오를랑말랑 하는 걸 보고 교실에서 나왔지요. 참 다행이었습니다.
열심히 잘 가르쳐주어야겠습니다.
한편 저희 집 화단에는 아마릴리스가 꽃을 피웠네요.
평안한 밤 맞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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