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모비딕> 한 구절에서 시작해 본, 교사의 화용론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6. 25.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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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는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지요. 맥락을 파악하면 우리는 짧은 말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생각과 감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모비딕>의 한 장면에서 시작하여 실제 사례와 발화의 맥락 분석을 통한 의미 파악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p.392~393 에이해브는 오랜 항해를 통해 비슷한 광경을 여러 번 봤을 테지만, 편집광적인 사람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조차 변덕스러운 의미를 갖는 법이다.
’나한테서 도망치는 게냐, 너희들?‘ 에이해브는 물속을 굽어보며 중얼거렸다. 별 뜻이 없는 말처럼 들렸지만, 그 말투에는 정신 나간 이 늙은이에게서 그때까지 본 어떤 모습보다 깊고 절망적인 슬픔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물론 화자의 판단에 에이해브의 모습이 전에 없이 슬퍼 보였던 것이고, 실제 에이해브가 느끼는 슬픔의 강도가 가장 강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마디의 말, 시선의 이동에서도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말이다.



#1.
선생님 올해도 미세차별 수업 하세요?
- 도움이 됐니?

어제 퇴근길에서 만난, 작년 가르친 학생과 나의 대화이다. 학생의 우호적인 미소와 어조로 보아, 1학년 후배들도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내용으로 골탕먹여주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아닌, 칭찬과 감사의 마음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해 동안 학습한 여러 내용 가운데 유독 기억에 남는 주제였고,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나는 수업이 도움이 되었는지 물었고, 되돌아온 학생의 답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성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였다. 참 고마웠다.




#2.
선생님, 이번 주 세 번의 수업이 있는데...
- 어, 안 돼.

자신의 준비도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았던, 에세이 쓰기 수행평가를 하루 정도 미루면 어떻겠느냐는 학생의 제안이 시작되려는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평가 일정을 더 미룰 수 없기도 하고, 타학급과의 공정성도 확보해야 했기에, 학생의 불안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단호박이었다.
^^;



#3.
외웠던 표현이 생각이 안 나서 머리에 생각나는 대로 썼어.
- 영어가 늘고 있구나.

에세이 쓰기 시험을 가까스로 마친 학생들이 긴장감을 수다로 해소하는 와중에 내 귀에 들려온 말이었고, 나는 놓칠 수 없었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글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거의) 외워서 작성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그냥 앵무새처럼 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보게 되며, 이것이 진정한 영어 의사소통능력 향상의 과정으로, 너희는 이 평가를 통해 영어 실력이 늘고 있는 거야, 라고 평가의 의미를 확인시켜 줄 아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또한 즉석에서 영어 표현을 영작해낼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 학생이 느끼는 뿌듯함을 격려해주고자, 학생들끼리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부러 큰 소리로 받아 응답한 것이었다.




#4.
각 반에 말하기 만점이 몇 명이에요?
- 반마다 달라요.

자신이 가장 잘한 학생의 대열에 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만점학생 수의 비율을 파악하면 자신의 점수가 몇 점인지를 대략 예상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소망을 품은, 며칠 앞서 점수를 알고 싶은 학생의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만점 학생 비율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줌으로써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 방식으로 채점이 이루어짐을 이야기해주며, 말하기 점수는 말했듯 며칠 후 에세이 점수와 함께 확인할 수 있을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려는 의도의 발화였다.




오늘 교사의 화용론 편은 여기까지입니다.
평안한 밤과 새 아침 맞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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