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삶의 발자취는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동시에 대단히 끔찍했다.
2장의 첫 문장입니다. 이러한 문장을 접한 우리는 다음에 어떤 끔찍한 삶의 모습이 펼쳐질지 상상하며 글을 읽게 되지요. 그런데 톨스토이의 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다음은 이반 일리치를 묘사하는데 쓰인 단어들입니다.
집안의 자랑거리, 총명함, 적극적, 유쾌한, 예의 바른, 훌륭한 성적, 재능, 온화, 사교적, 의무라고 생각한 것은 엄격하게 해내고야 마는,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이끌림, 관능, 허영심, 고상함, 위엄, 정확, 청렴, 장난기, 재치, 선량하고 점잖은 호인, 깨끗한 손, 깨끗한 셔츠, 고위 인사들의 인정, 정중, (자기 의지에 종속된 사람들에게도) 동료처럼 곧잘 대하는, 우호적인, 힘을 남용하지 않는, 부드럽게 표현하는, 즐거움, 매력, 개인 견해는 완전히 배제, 필요한 형식은 충실하게 준수, 교양 있는, 빠르고 영리하게 생각, 대체로 승리, ...
위의 워드클라우드에서 '단순함'이나 '평범함', 혹은 더더군다나 '끔찍함'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단어라면 모를까요. '특별한', '고귀한', 귀족적인', '덕망 있는', '촉망받는', '신뢰할 만한', '기품 있는', '우월한', '난사람'과 같은 단어들 말이지요. 실제로 사람들은 저 정도면 정말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살았노라고] 평가할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도 사회인으로서, 또 한 개인으로서 지니게 되기를 원하는 특성들이 아주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끔찍함'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한참을 머무르더군요.
고심하다가, 어쩌면 평가의 주체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의 자랑거리'로서 '이런 모습까지 보이다니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며, 타인으로부터 대체로 인정받고 존경받을 만한 시민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살아가며 기울이는 모든 노력과 수고의 근간이 어쩌면, 창조주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에는 지극히 부질없고, 결국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교만함과 허영의 모습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철저히 인간적이고, 어쩌면 끔찍이도 가식적인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회적으로 날고 긴다 해도 결국은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가느라 아등바등하는 인간의 모습일 뿐이므로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이라는 수식어가 또한 이반 일리치의 삶에 대한 평가에 덧붙여지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생각이 닿자, 저는 뒤통수를 아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영어 수업 전문성도 뛰어나고, 피아노에 발레에, 성격도 좋고, 옷도 잘 입고, ...... 하는 말들을 듣기를 바라 마지않는 제 모습이 보여 얼굴이 아주아주 화끈거리고 말이지요. (심지어 오늘 발레선생님께 말로 설명해준 적이 없는 고난도 동작을 보고 따라했다고,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폭풍 칭찬을 듣고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집에 왔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당신의 삶이 '대단히 끔찍했다'는 평가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평안한 밤과 새날 맞이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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