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사회 통합을 고민해야 합니다. 통합된 사회의 모습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생각이 존중받고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사회일 것입니다. 저는 통합을 위한 교육을 고민합니다. 오늘은 두뇌 발달에 언어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찰을 통해 예술 비평의 교육적 가능성을 고찰하고자 합니다.
언어의 단순화에 대한 우려
헐
기쁘거나, 슬프거나, 황당하거나, 염려되거나, 놀랍거나 한 모든 순간에 쓸 수 있는 한 음절의 말입니다. 만병통치약처럼 효용이 많은 어떤 대상과는 다른 어떤 개념 또는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일본의 어떤 정치인은 기후 변화 문제에 "Fun하고 Cool하고 Sexy하게 대처해야 한다." 답했다고 하네요. 무언가 이색적이고 멋져 보이기도 한 그의 짧고도 신선(!)한 발언은 그러나, 기후 변화에 대한 어떤 실질적 해결 가능성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형식은 갖추었으나 내용은 '비어있는' 말인 것이지요.
기후 변화 문제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상태에 대해서도 붙일 수 있는 이러한 말은, 우리 젊은 세대들의 '헐' 풍조와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언어가 단순해지고, 단편화되며, 논리는 없어집니다.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도구인 언어가 고유의 기능을 다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우리 인간의 두뇌에,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이 교육자로서 저의 우려입니다.
언어의 정교화를 위한 교육적 대안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언어 사용)를 통해 우리는 정보를 처리하고 의식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지적 정교화가 이루어지고 두뇌가 발달하는 것이고요. 따라서 언어가 단순화되면, 인류의 두뇌는 정교화의 기회를 잃게 됩니다. 한편 단순화는 단순히 길이의 짧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의 언어는 동일하게 짧지만, 아주 많은 생각과 감각이 응축된 형태로 표현된 고도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고의 길이가 짧아지는 언어의 단편화 현상과 그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한 대안으로 저는 예술 비평을 제안합니다.
조지프 르두의 <불안>에 따르면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뇌가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논의를 함에 있어 '시각적 의식'에 주목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망막이 전자기 에너지(빛)를 받아들이면, 망막의 뉴런들은 시각 자극을 표상하는 신경 자극을 발생시킨다고 합니다. 이렇게 발생한 시각 자극이 시각 시상 영역으로, 또다시 시각 피질로 전달되면서 복잡한 통합의 과정을 거쳐 우리의 '의식'을 형성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합의 과정에서 감각의 '보고 과정'이 의식의 형성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언어를 통해 논리를 부여하는 과정이 바로 '자극(학습내용)'을 '의식(배움)'으로 이어지게 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단순히 '보는' 행위가 아닌, '언어'를 거침으로써 전전두 피질(의식과 관련된 뇌 영역)을 활성화하여 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예술 비평의 교육적 효용
시각적 의식에 대한 고찰이 교육 현장에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순히 텍스트, 동영상, 그림 등 다양한 매체를 읽거나 감상하는[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에 대한 이해, 생각, 느낌 등을 발표하거나 쓰는[언어화하는] 과정이 효과적 학습[두뇌 활성화]을 유발한다는 것이지요.
한편 명화와 같은 예술작품 그리고 이에 대한 비평 활동이 특별히 두뇌 활성화에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휴대전화 화면을 통해 한스 홀바인의 <무덤에 안치된 그리스도>를 감상하였습니다.

숨을 거둔 후 시간이 지난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검푸른 빛이 감돕니다. 초점이 없는 눈은 허공을 향해 있으며, 피에 물든 이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입니다. 앙상한 옆구리와 손등에는 피와 멍자국이 선명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발에는 돌과 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세상은 왜 이런 모습이고 나에게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던 저는,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양의 노고와 처절한 순종을 바라보며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 대신 슬퍼하는 마음을 얻고, 누구보다 크게 용서받은 자가 바로 저 자신임을 인정하며 깊이 감동하는 등 감성적 자극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성적 자극도 이루어진 듯합니다. 저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내가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자고 다짐하게 되었고, 따라서 책을 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각적 자극[예술 작품]을 통해 감성[작품 감상]과 이성[현재 삶의 문제에 대한 비평]의 총체적 자극을 통해 의식이 활성화[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모색]된 것이랄까요!
다시 말해, 이 글은 예술 작품 비평을 통한 제 두뇌 활성화의 결과[삶과 연계된 실천]입니다.
예술 작품을 통한 삶의 비평, 그리고 불안의 해소는 알랭 드 보통도 그의 책 <불안>을 통해 제안한 바이기도 하지요. 예술 비평을 통해 학생들의 두뇌가 마구마구 활성화 되는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의 글을 맺습니다.
복되고 평안한 주말과 감사가 넘치는 고난주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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