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권 회복 및 공교육 정상화와 관련하여 마음이 어지러워 이 책 저 책 읽고 있다. 다니엘 카너먼의 <생각에 대한 생각>,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이병곤의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기> 등. 절대 독서량도 적은데 심지어 여러 책을 한꺼번에 읽고 있어서 더 마음이 산란해지는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오늘은 아는 분의 자녀의 일시적 실종 사건으로 소동이 있었다. 새벽에 학교에 일이 있다고 나갔다는데 세 시간이 지나도록 학교에 도착하지 않고, 전화기는 꺼져 있다는 소식에 그야말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반 후 학교에 잘 도착했다고 전해 듣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 얼마 안 있어서는 병원 가는 길에 학교에 잠시 들렀다며, 한 학생이 옆자리 선생님을 뵈러 왔다. 최근 암 진단을 받았는데 몇 기인 지는 검사해 보아야 한다며 해맑은 얼굴로 소식을 전해 선생님을 울렸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갈 수밖에 없었던 아이와, 학교에 오고 싶지만 올 수 없는 두 아이를 보고, 도대체 인생에서 뭣이 중헌디,라는 생각이 들어 뒤로 한 채 태업에 돌입했다. (말이 그렇다는 소리다. 학력평가 시감이 없는 시간에는 책은 닫고 학습지 제작도, 이런저런 업무 논의도 처리도 했다.)
오늘 또 한 권 새로이 집어 들었고, 놓지 못하고 가방에 넣어 온 책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2008년 영화를 보고 너무나 깊은 충격을 받아 며칠 동안 휘청(?)거렸던 생각이 난다.
이번에는 원작인 책을 통해 다시 휘청거리고 있다.
삶은 무엇인가, 학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백색 실명 감염이 번져나가자 격리조치를 시행하는 부분에서는 지난 2년의 코로나 시국이 떠올랐다. 감염 방식에 대한 이해도 없던 초반에는 물안경이나 방독면을 쓰고 공항에서 입국하는 사람도 있었고, 확진자가 다녀간 건물은 폐쇄 및 방역 조치를 시행했고, 확진자와 접촉한 동거가족만 있어도 온 가족이 벌벌 떨며 다 함께 격리를 했었다. 그랬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보건당국에서 격리시설과 방식에 대해 논하는 장면에서는 코로나 시기 다시 읽은 까뮈의 <페스트>가 떠올랐다. 의사 리외와 카스텔을 중심으로 의병대를 조직하는 등 의기투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페스트> 달리,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보균자 중 실명한 사람을 알아서 쫓아내 격리시킬 것이므로 관리감독자가 필요 없다는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이기적 본성을 고발한다.
어느 편이 실상과 더 가까울까? 이 이야기까지 시작하면 논문^^;이 시작되고 끝은 맺지 못할 것이 뻔하여, 오늘은 '봄'과 '보지 못함'에 대해서만 다루어보려 한다.
1. 본다[안다]는 것
무엇을 보고 있다, 혹은 보아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름다운 하늘을 보고, 시계를 보고, 냄비의 끓어오르는 수증기를 보는 등 우리의 의식이 있고, 시각을 담당하는 신체 기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눈앞의 대상을 지각하고,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뇌에서 이를 인지한다. 그리고 대상의 이모저모를 관찰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대상의 속성에 대해 알게 된다. 사람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도 대략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속에 경향성과 일관성을 찾아가며 사람에 대한 나의 이해를 조정해 간다.
2. 모르지만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는[보고 있는] 것들
본[배운] 적이 없거나 전체를 보지 못했지만 아는 것도 있다.
위험 요소처럼 본능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따라서 아는 것들이 있다. 빨간색을 보고 경계심이 든다거나,...
한편, 보지 않아도 경험을 통해 결과를 추론 및 예측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번개를 보면 천둥소리를 예측하고, 얼굴이 붉어진 채 서로 노려보고 있는 젊은 남녀를 보고는 사랑싸움을 했을[하고 있는] 것임을 짐작하여 아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순간순간 의사결정을 내려가는 것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처음 맞닥뜨리는 문제상황에 대해서도 유사한 상황에의 대입을 통해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 기회비용 및 각종 리스크를 최소화해 간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보지 못해도[못했어도] 아노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3. 본다[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것들
하지만 타인의 성격, 의도, 취향, 나의 생각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상 알고 있지 않은 것들도 많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학교로 이야기를 좁혀 보자.
학업 성적이 어느 정도인 아이는 필시 어떠한 성품을 지녔을 것이라는 교사의 나름 합리적이고 자신감 있는 추측은 참으로 많이 빗나간다. 똑같은 아이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 학교 교사들이 어떨 것이라는, 관리자들은 어떨 것이라는, 특성화고에서 전학 온 학생들은 어떠할 것이라는 말들과 생각들, 시선들도 알고 보면 선입견뿐일 때가 너무나 많다.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편협한 시각을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므로 고정관념이 화석화 내지 고착화되어 가기 쉽다는 점이다.)
또한, 영어는 언제부터 배워야 하고, 시험성적은 어느 정도 나와야 하고, 배달을 하거나 튀기지 않고 치킨을 시켜 먹는 사람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대학 나와야 한다는, 살아봐서 안다는 듯한 무수한 가르침들이 과연 얼마나 삶을,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잘 볼 수 있게 돕는가. 인식하도록 돕기는커녕 눈과 귀와 입과 생각을 틀어막는 기제가 되는 것이 ‘우리의 앎’ 혹은 ‘안다고 생각하는 자세’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처럼 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으나 볼 수 없는 상태에 빠진 눈을 ‘유리처럼 죽은 눈’으로 표현했다.
백색 질병이 번져가듯, 문제풀이를 시키고 숫자와 단어와 용어들을 외우고 또 외워야 한다는 생각들이, 유리처럼 죽은 눈들이, 역병처럼 아이들에게 전파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주체성은 ‘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타인을 존중하는 일의 소중함 등에 대해 생각할 수도 그럴 이유도 없게 된.
결국 5지선다 문제를 잘 봐야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사회에서, 그런 시험을 대비하는 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학교에서는, 어쩌면 학생도 교사도 유리처럼 죽은 눈을 지니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이 시작되고 우리의 평가 및 선발 시스템, 그리고 사회 자체의 불완전함을 마주하면 괴로워질 뿐일지도 모르므로.
4. 글을 맺으며
책에 ‘장님들은 안과에 가지 않는다’는 기가 막힌 표현이 나온다. 우리는 이와 같이 어떻게 바꿔야 할지도 바꿀 수 있는지 어쩐지도 모르겠어서 병원에 가볼 시도조차 않는 장님, 혹은 베데스다 못에 데려다줄 사람이 없어서 체념한 채 주저앉아 있는 삼십팔 년 된 병자와 같은 모습이 아닌지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백색 질병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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