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불편한 <모비딕>과 문학의 가치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5. 11. 11:59
728x90



<모비딕>은 기독교인인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신앙에 대해, 신앙인의 삶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지기 때문인 듯하다.


출처: 교보문고 인터넷 서점


  • 그를 움직인 심원한 동기는 기독교인들과 생활하면서 제 동족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아니 그것을 넘어, 지금보다 더 월등하게 만들어 줄 기술을 배우겠다는 깊은 열망이었다고, 그는 내게 말했다. 하지만 아뿔싸! 고래잡이 일을 하고 보니 기독교인들도 불행하고 사악할 수 있으며 아버지가 다스리는 미개인들 못지않고 오히려 능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마침내 새그 항에 도착해서 선원들이 하는 짓을 보고, 뒤이어 낸터컷에서는 선원들이 <그런> 곳에 가서 급료를 어떻게 쓰는지 봤을 때, 가여운 퀴퀘그는 모든 걸 단념해 버렸다. 어딜 가나 전부 사악한 세상이라고, 이교도로 살다 죽겠노라고 그는 생각했다. (12장 간략한 생애 중에서)


저런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나는 예수를 믿지 않겠어, 다짐하게 만드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정말 괴롭다. 물론, 사람은 본질이 미완의 존재이며 흠결 투성이일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결한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 자체가 가식 혹은 더 무섭게는 교만으로 치닫게 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마음이 나로 인해 낙심하게 되는 일이 되도록이면 없게 해주시라고,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 이 섬에는 애초에 그 종파 사람들이 들어와 정착했기 때문에 대체로 오늘날까지도 퀘이커교의 특징을 유난히 많이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외지의 이질적인 것들이 유입되면서 다채롭고 기이하게 변하기도 했다. 바로 이 퀘이커교도들이 뱃사람이나 고래잡이 중에서도 피비린내 진동하게 살벌하니 말이다. 이들은 싸우는 퀘이커교도, 복수심에 불타는 퀘이커교도다. (16장 배 중에서)


싸우는 퀘이커교도’, ‘복수심에 불타는 퀘이커교도’, ...

마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과 같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얼마나 슬프고 한심스러운 모습이란 말인가.

다음은 퀘이커 교도의 신앙에 대한 정보를 위키백과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퀘이커 교도들은 개신교 교파에서 급진적 재건주의로 서방교회의 예식을 거부하며, 순수한 신앙을 강조한다. 청교도와 다르게 칼빈주의의 예정설과 원죄 개념을 부인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신성(神性)곧 하느님의 성품이 있으므로 이를 기르는 법을 배우면 되고, 그렇게 신성만 기른다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출처: 위키백과

자신의 정체성을 신앙인으로 밝히면서도, 자신의 교파에서 표방하는 순수한 신앙의 추구와는 거리가 먼, 따라서 구원으로부터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타인은 지켜보고 있다.


  •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 먹거나......”

   “이봐, 빌대드 선장.” 펠레그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 젊은이한테 배당을 어떻게 줄까?”
   “그거야 자내가 제일 잘 알겠지.” 음산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777분(1/777을 뜻함)이면 너무 지나치지 않겠지?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며......”
   “쌓아 둘 것도 없겠군. 나는 생각했다. (중략)
   ”나는 3백분의 1 정도를 줄까 하는데. 내 얘기 듣고 있나, 빌대드? 3백분 배당이라고.“
   빌대드는 성경책을 내려놓고 엄숙하게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펠레그 선장, 자네는 마음도 넓군. (중략) 우리가 이 젊은이의 노동에 지나치게 후한 보상을 한다면 그 과부들과 고아들에게서 빵을 빼앗게 될지도 몰라. 777분 배당으로 하게, 펠레그 선장.“

어떻게든 품삯을 적게 주려는 드글드글한 욕심을 감추기 위해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한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빌대드 선장의, 아니 우리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자. 남보다 좀 더 잘 나가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말이다. 최근 경인교대 정혜승 교수님께서 질문에 대한 강의를 하시며 말씀하셨다. ‘무엇이든 알 수 있게 되는 소원을 딱 한 가지만 빌 수 있다면 어떤 소원을 비시겠어요? 저는 세속적이어서요. 수퍼볼 번호.’
그 솔직함에 차라리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자문한다.



  • 그는 에이해브일세. 자네도 알겠지만 에이해브라고, 옛날에 그런 왕도 있었지 않나! (중략) 에이해브 선장이 자기 이름을 지은 게 아니잖나. (중략)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다 거짓말이야. 나는 에이해브 선장을 잘 알아. 오래전에 함께 배를 탔지.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네. 좋은 사람이야. 빌대드처럼 신앙심이 깊지는 않아도 좋은 사람이야. (중략) 고통받고 망가졌을지언정 에이해브에게도 나름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네! (16장 배)


신앙인보다 훨씬 존경할만하고 인간적인 기준에서 ‘고결하다’ 부를만한 삶을 사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다. 성경적 기준에서 ’착하다‘는 것은 ‘신적인 속성’, ‘완전무결함‘을 의미하므로 사람이 자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상태이나,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는 우리가 한 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문학은, 우리 안의 무뎌진 양심을 섬세하고 예민하게 복원시켜준다. 문학의 가치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