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의 힘 - 나의 수치는 너의 몰입,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성공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9. 11. 22:54
728x90

 

 

 

 

인트로. 오늘의 수업은요

 

오늘 한 학생이 작성한 학습일지를 보여드릴게요. 어떤 수업이었고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 것인지 한번 맞춰 보세요. 

 

 

 

 

저도 다시 한번 읽어보며 학생 글의 맥락에 드러난 오늘 수업을 되돌아보는데, 또 웃음이 납니다. 오늘 글의 주제는 학생들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의 힘입니다.

 

학생들과 함께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발췌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타인이 나를 불명예스럽게 깎아내린다고 해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성적 사고를 가동함으로써 건강한 자아상을 형성할 수 있다는 내용을 토의토론과, 협업을 통한 영작 활동을 하며 학습하였습니다.

 

 

 

수업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는 백 한 가지 요인들

 

변명부터 하자는 것은 아닌데요, 수업이 잘 진행되지 않는 순간도 분명 있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같은 수업을 해도 학급마다, 수업 차시마다 어쩜 이렇게 반응들이 다른지 매번 신기합니다. 워낙 학급의 분위기가 우호적이거나 협력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뭘 해도 약간 시큰둥한 반응의 학급도 있고, 와글와글 웃음보가 많이도 터져서 모드 전환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반도 있거든요. 한편 주말을 보낸 후 1교시의 수업과, 땀 흘려 체육활동을 하고 온 직후, 점심 먹은 후, 친구들 사이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거나 담임선생님께 혼이 난 직후, 소규모 테마여행을 앞둔 상황 등 수업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는 아주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상황도 각기 다 달라서 개별 학생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리에 앉아있는지도 다 헤아릴 수 없고요. 그런가 하면 교사의 심경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사건이나 사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문서 창을 열 개 정도 띄워놓고 눈알을 굴리며 업무를 하다가 수업에 들어가면, 교사도 모드 전환에 시간이 좀 걸리게 마련이지요.

 

 

 

왠지 안 먹히던 수업이 먹혀 들어가던 순간

 

제가 좀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되는 어느 학급에서, 요즘 알랭 드 보통을 읽는 분위기는 뭐랄까, 군대 점호 시간 같습니다.(군대를 가보진 않았지만 수련회 가서 엄청 험악한 표정의 교관선생님 앞에서 줄 맞춰 각 잡고 앉아 점호받았던 기억은 나기에 군대 점호 시간도 비슷할까 하여 상상해 보았습니다.)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또 무슨 이야기를 하며 지적질을 당하게 될까 눈치 보고 있는 것 같달까요. 시종일관 대놓고 불만의 눈빛을 하고 있는 학생도 있는 걸 떠올리니 '점호'는 적절한 비유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하여간, 오늘도 그랬습니다. '타인을 하대하는 오만한 태도는 낮은 자존감 혹은 공포심의 발현'이라는 전차 시 수업 내용에 못내, 마음이 불편했는가 봅니다. 특히 다른 친구를 자주 놀리고 비웃기도 하던 학생들이 저랑 아예 눈을 마주치지 않더라고요.

 

그래프와 지문의 논리적 상관관계를 유추해 보기도 하고, 도식자의 빈칸을 넣어보기도 하고, 나름 열심히 준비한 수업이 학생들 머리에서 그리고 마음으로 들어가는지 어떤지 전혀 모르겠는 상태에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수업은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 눈들이 제게로 일제히 향하게 만들고 심지어 이제는 정말로 수업에 들어오게 만든 순간이 있었습니다. 궁금하시죠? 힌트는 학생의 학습일지입니다. 스크롤을 잠시 올려 맞춰 보셔도 좋습니다.

 

 

제 경험담을 이야기 했거든요.

 

타인이 나를 불명예스럽다고 비난할 때(학생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급식체로 바꿔서 표현했습니다. '너는 찐따야'라고요), 그것이 사실이면 불명예스러운 자아상이 형성된다('나는 찐따야')는 내용의 설명을 돕기 위해 제 초등학교 1학년 시절 흑역사를 끄집어냈습니다.

 

선생님이 고백할 게 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의 스누피 지우개가 너무 예뻐서 슬쩍한 거예요.

 

 

학생들이 토끼눈을 하고 저를 바라봤겠지요? 잠자코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출처: 픽사베이

 

 

 

 

 

 

 

어, 이거 내 거 아니야?
짝꿍이 물어보는데, 잡아뗐죠. 아빠가 사다 주신 거라고.
용기를 내서 실은 내가 훔쳤다고 끝내 이야기를 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얼마나 부끄럽던지,
도둑질을 하면 절대 안 되는구나, 뼈저리게 느꼈어요.

 

 

이때부터는 완전 초 집중이었죠. 학생들의 몸이 제 쪽으로 한 10도는 기울어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나에 대한 타인의 부정적인 관점이 사실일 때 생기는 자아상의 예시와 사실이 아닐 때의 예시에 적절한 영단어를, 학생들이 엄청 활기차게 답변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수업을 나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고, 다음 수업의 시작은 좀 더 우호적일 확률도 높아졌네요.

 

 

 

다시, 이야기의 힘

 

아마 비난받는다고 생각하며 한껏 쌓아 올린 마음의 장벽이, 자신의 부끄러운 기억을 솔직하게 꺼내놓는 교사의 모습에 조금 녹아내렸는가 봅니다. 이야기는 역시나 공감과 몰입을 유도하는 힘이 있네요.

심지어 교무실에 불려 와서 좀 심각하게 혼난 일이 있고, 또 오늘 수업 전반에도 계속 친구와 이야기하며 수업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던 어느 학생조차도, 수업이 끝나고 제게 와서 질문을 하며 제 충혈된 눈을 걱정해주기까지 하더라고요 글쎄.

 

 

 

에구. 뒷목이 계속 당기고 눈도 아파서 어서 자야겠습니다.

문해력을 높일 방안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하고, 업무도 해야 하고, 정기고사 이후 수업 준비도 해야 하고 일들은 켜켜이 쌓여 있는데 몸이 영 안 따라주네요!

 

 

 

평안한 밤과 새 날 맞이하세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