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효율성만 추구하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오늘 나는 학교의 비효율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1교시 국어영역 감독을 마치고 책도 읽고, 잠시 눈도 붙이며 쉬고 있는데 대학수학능력시험 고사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답안지에 어쩌다 보니 도장이 누락되었나 싶었다. 수험생 답안지에 감독관 도장이 누락되어 이를 추후에 발견하면, 시험이 모두 끝나 귀가했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와서 도장을 찍어야 한다. 도장은 감독관의 감독 아래 문제없이 응시한 수험생의 답안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두 번 세 번 확인을 했던 터라 이상하게 여기며 고사본부에 갔다. 나를 부른 이유는 결시자 답안지의 짝수형/홀수형 문항 칸을 표시하는 마킹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도장이 누락되었다거나, 답안지 회송용 봉투나 응시현황표 등 중요 문서 기재사항이 잘못되어 정정 후 날인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본부요원이 시험장 책임자(학교장)의 임장 하에 잘못되거나 누락된 내용(수험번호, 짝홀수형 등 문형, 결시자 확인란 표기 오류 등)을 정정할 수 있다.
그런데 1)답안지 마킹 실수를 인지한 본부요원이 2)다른 본부요원을 보내어 3)본부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감독관 대기장소에 있는 시험실 감독관(나) 이를 알리고, 4)해당 감독관(나)이 본부에 가서 마킹을 한 군데 하고 5)다시 먼 길을 돌아오는 절차를 선택했다. 마킹이 하나 누락되어 이를 정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1)의 본부요원이 시험장 책임자의 감독 하에 마킹을 하면 바로 끝나버릴 일을 말이다.
이 얼마나 소모적인 행정력 낭비란 말인가.
본부요원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주지시켜 드렸더니, 옆에서 지켜보시던 학교장님께서 한 마디 거드신다는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다음에도 그러실까 봐 그러지 마시라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본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같은 실수를 앞으로 또 할까 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본부에서 처리하지 않고 불렀다니. 하지만 이것은 사람을 적잖이 낙담시키는 말이었다.
우선, 내가 작성한 다른 결시자들의 답안에는 홀수/짝수 표시가 문제없이 되어 있었고, 하나의 답안지에만 마킹이 누락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는 결시자 표시를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다음에도 계속 결시자 답안지를 미완성의 상태로 본부에 제출할 가능성이 낮았다.
그리고, 본부에서 바로 처리해도 되는 일을 행정력을 낭비해 가며 감독관이 하도록 시키는 것은 다분히 고압적인 태도이다. 관리자가 직원에게, 동료가 동료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게 되면 상대방은 위축되고, 사기가 꺾이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업무 수행의 자발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자연히 수행 능력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견해
너 앞으로 똑바로 해.
라는 지적하는 말보다는
이렇게 많이 노력했구나.
라고 말하는 것이 장기적인 사기 진작과 성과 향상에 도움이 된다.
학교는 특히 교사가 (아랫사람인+미래사회의 주역인) 학생의 발전을 도모하는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이러한 꼰대문화를 적극적으로 감지해 없애고, 효율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문화를 형성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첫째, 학생의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서이고, 둘째, 좀 더 성숙하고 합리적인 미래 사회를 가꾸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렇게 합리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면, 타인의 허물을 지적질하거나 들추어내지 않겠다는 결단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를 격려해 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비단 학교뿐만 아니라 어떠한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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