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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을 통해 고찰하는 인간의 이중성과 폭력의 문제

글을써보려는사람 2024. 5. 2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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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1권 34장 ‘선실의 식탁’에는 식사자리에 드러나는 에이해브의 권력이 그려져 있다. 권력의 결과를 이중성과 폭력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1. 인간의 이중성




1.1. 사회화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면성을 지녔다. 사회화 과정 자체가 이중성을 기르는 과정이다. 본능에 충실한 영유아기를 지나고 학령기와 청년기를 보내며 인간은 차츰 분노, 욕구, 기쁨, 슬픔과 좌절을 감추는 법을, 때와 장소, 상황(TPO)에 맞는 가면을 장착하는 법을 배워간다.




1.2. 불안

성격의 이중성이나 정동 및 태도의 일시적인[잦은] 돌변은 사회화 과정에서만이 아닌 불안의 문제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불안은, 개인을 위축시키고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돌변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문제들에 대한 과도한 염려와 근심이, 자녀들의 일시적 말다툼에 대한 폭력적 언행으로 엉뚱하게 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성이 무너지는 것은 정말이지 일순간이다. 인간이 매사 평정심을 유지하고 일관적인 태도를 변함없이 견지한다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한 순간에, 불안이 폭력으로, 광기로, 폐쇄성으로 돌변하기도 하는, 인간은 나약하고 가변적인 존재이다.



1.3. 권력에의 추종

  • p.255 하지만 자유분방하고 유쾌한 꼬마 플래스크는 아래 선실 입구에 접어들기 전에 잠시 걸음을 멈춘 다음 전혀 다른 표정을 뒤집어쓰고서, 천민이나 노예의 배역을 맡은 것처럼 에이해브 왕을 알현하러 들어간다.
  • 공개된 갑판에서 간부 선원들이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선장한테 대담하게 대들다가, 바로 다음 순간 선장의 선실로 식사를 하러 내려가면 상석에 앉은 선장한테 비굴하게 변명까지는 않더라도 십중팔구 금세 온순한 표정을 짓는 것은 과도하게 인위적인 해상 생활의 산물로 전혀 이상할 건 없지만, 그래도 경탄스럽다 못해 가끔은 더없이 우스꽝스러운 게 사실이다. 왜 이렇게 돌변하는 걸까?



위 구절에서 선원들이 돌변하는 이유는 권력에의 두려움이다. 권력은, 혹은 권력에의 추종은 굴종적이고 이중적인 태도와 부자연스러움을 낳는다. 참된 자아 혹은 내면의 자유분방한 욕구나 상태를 가리[기를 요구받]는 까닭이다. 에이해브[권력] 앞의 선원들[우리들]의 돌변은 엄밀히 말하면 사회화의 과정과 힘의 논리, 그리고 불안의 문제가 뒤섞여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 폭력: 억누름과 억눌림의 유효 기간

2.1. (비)자발적 억누름


에이해브의 절대 권력은 다음 구절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 p.257 이 선실의 식사도 어딘가 근엄하고 엄숙한 침묵 속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에이해브가 식탁에서 대화를 금지한 건 아니었다. 그저 본인이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 그는 닭다리를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플래스크가 멋대로 먹을 걸 집었다면, 그에게 그건 일급 절도죄에 버금가는 것처럼 여겨졌을 테고 이 정직한 세상에서 두 번 다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노릇이지만, 에이해브가 그러지 못하게 그를 막은 건 아니었다.
  • 플래스크보다 고작 한 단계 높을 뿐인 스터브가 입맛이 없어서 식사를 일찍 마칠 조짐을 보이면 플래스크는 더 분발해야 한다.



에이해브는 침묵을 강요한 적이 없지만 선원들은 침묵한다. 에이해브는 닭다리 먹는 것을 금한 일이 없지만 선원들은 닭다리는커녕 버터에조차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억누름의 먹이사슬의 하위 계층은, 억누르는 힘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억눌러 자발적으로 억눌린 상태가 되기도 한다. 뇌리를 스쳐가는 소름끼치는 상상은, 억누름의 강도가 매우 높은 상황에서도 억누르는 자와 억눌린 자 모두가 밝게 웃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2.2. 억눌림의 유효 기간


먹이사슬의 최하위 계층에 있는 자의 억눌림의 유효 기간은, 자신보다 높은 계층이 사라지거나(일시적일 수도 있다), 지각 변동이나 새로운 하위 계층의 형성으로 인해 자신의 하위 계층이 생겨나는 때까지이다.



2.3. 억누름의 점층법, 혹은 폭력의 대물림


억누름의 세기는 외부의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단계를 내려갈수록 증폭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장의 못마땅한 헛기침 소리를 들은 부장이 과장에게 핀잔을 주고, 과장이 대리를 갈구고, 대리가 인턴사원을 잡는 식으로 말이다.

학교에서도 이러한 양상을 종종 관찰할 수 있다. 교사가 문제 학생을[혹은 (잠정적인) 문제 행동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경우, 학생은 교사의 권위가 두려워 바른 길로 접어들 것 같지만[표면적으로는 정말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교사의 감시를 벗어나는 순간 학생의 억눌린 에너지가 약체에게로, 약체에게서 최약체에게로 강화되어 전승되기도 한다.

학교를 가정으로, 교사를 보호자로, 학생을 자녀로 치환할 때 아주 유사한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억누르는 힘은 억눌림을 달성해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또 다른 억누름을 낳는 것이다.



(시간이 늦어 성급하지만 유일한 결론을 내리자면,) 힘의 불균형[폭력]에의 유일한 해결책은 다른 더 강한 힘이 아닌 사랑의 힘이다.



세상의 모습이 안타깝고 괴롭고 슬픈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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