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두 작품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서로 다른 두 화가가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의 제목도 <라 그르누예르>로 동일합니다. 위의 작품은 르누아르가, 아래의 작품은 모네가 그렸다고 합니다.


전반적인 색감이 르누아르는 붉은 계열의 빛이 적절히 들어가 따스한 느낌을 주는 반면 모네는 푸른 계열의 물감 위주로 채색하였네요. 대상을 표현하는 붓질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르누아르는 나뭇잎의 처리도, 사람들의 옷도 섬세하게 나타낸 반면, 모네는 대담하게 가로선을 사용하여 나룻배 주변의 넘실거리는 물결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르누아르의 그림에 비하면 모네는 사람들을 '대강'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섬세한 표현'은 모네가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더 옳을까요? 당연히 답은 없겠지요. 정답이 정해져 있는데 누군가가 비껴갔다기 보다, 서로 다른 부분에 더 집중하고 몰두한 것일 테니까요. 저는 모네의 과감함에 마음이 더 끌리지만, 르누아르의 아기자기함에 마음이 가는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네는 르누아르를, 르누아르는 모네를 속으로 은근히 폄하하며 자신의 기법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가 모네나 르누아르의 마음속에 들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친밀한 동료로서 서로의 색깔과 특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대상을 이렇게 다른 색으로 '맛깔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탄복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네의 <라 그르누예르>에 르누아르의 사람들을 붙여 넣기 했다면, 그것은 마치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으려고 시도했다가 결국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는 평을 받는, <정원의 여인들> 같은 느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한편 저는 오늘 아이의 학교에 학부모 총회에 참석하여 공개 수업을 참관하였는데요, 학생들이 저마다 지은 시화를 발표하더군요. 숙제, 반려동물, 가족, 친구 등 아주 다양한 소재에 대해 저마다의 생각을 담은 시를 낭송하였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들거나 덜 마음에 드는 시에 대한 '선호도'는 있었을지언정, 어떤 시도 다른 것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시가 학생 각자가 바라보는 세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해 낸 귀중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생각과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서로의 공존, 그리고 더 나아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인 것 같습니다. 어느 블로거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아름다움(beautiful)의 어원은 '나다움'이라고요. 나(모든 이)의 연약함까지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정말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이라고요. 이런 사회는 참으로 기쁨이 넘치겠네요.
그런 면에서 저는 저의 연약함을 참고 감내해준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많고 또 아름다운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중인가를 새기며, 한없이 겸손해지는 밤입니다.
우리네 삶도 이토록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평안하고 복된 밤과 아름다워서 기쁜 새날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글의 내용 중 미술작품에 대한 설명은 크리스토프 하인리히의 <클로드 모네>를 참조하였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장 17절 말씀
'문화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손실 회피 전략과 고흐의 쉽지 않았던 선택 (12) | 2025.04.09 |
---|---|
한국 문화를 꿈꾸다 #5 - 비관적 낙관주의자 (7) | 2025.03.24 |
한국 문화를 꿈꾸다 #3 - 우리들의 자존감을 높입시다 (18) | 2025.03.04 |
신동호의 <대통령의 독서법> 독서일기 - 좋은 문화 형성은 어렵고도 중요하다 (22) | 2025.02.22 |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기 (18) | 2025.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