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73

모비딕에서 발렌시아가까지 - 천박성에 대한 고찰

p.356 인간은 강렬한 감정에 휩싸였을 땐 하찮은 고민을 경멸하지만, 그 순간은 금세 지나간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본질적인 천성은 바로 천박함이라고, 에이해브는 생각했다. 흰 고래가 야만적인 선원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고 야만성을 자극해서 의협심까지 넉넉하게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오로지 좋아서 모비딕을 추격한다 하더라도, 좀 더 평범하고 일상적인 식욕을 만족시켜 줄 음식도 먹어야 했다. 옛날 숭고하고 기사도적이던 십자군들조차, 성전을 벌이기 위해 3천 킬로미터가 넘는 산천을 가로지르는 동안 강도질을 벌이고 남의 주머니를 털며 이런저런 부수입을 챙겼다. 그들을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목표에만 엄격하게 묶어 놓았다면, 바로 그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목표가 지긋지긋해져서 등을 돌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도서 2024.06.23

이야기와 공감, 논증과 공감

1. 이야기와 공감 왕따의 경험, 외모 지상주의 및 능력주의에 물든 사회 문화 등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졌고, 결과적으로 칭찬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글을 본격적으로 분석할 참이었다. 한 아이가 눈과 코가 빨개지면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아뿔싸. 황급히 나의 이야기를 했다. 왕따의 경험이 얼마나 괴롭고, 또 사람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드는지를. 그리고 그게 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친구들이 나랑 좀 놀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도 안 놀아주더라. 어느 날은 다 같이 놀다가 친구 집에 가서 물을 마시는데 웬일로,00야, 너 먼저 마셔. 하는 거야. 핵인싸 친구의 친절에 눈물 나게 기뻐하며 물을 받아 마셨는데, 알고 보니 침을 뱉은 물이었대. 아이들의 공감과 연민의 시선이 느껴지기에 이..

도서 2024.06.17

추측에 대한 이야기들(작성중)

p.305 비교적 소수의 고래잡이만이 그 고래의 실체를 봤고, 실제로 맞서 싸운 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고래잡이 선박의 수가 워낙 많고 넓은 바다 전체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으며, 그중 많은 수가 외딴 해역에서 무모한 추격을 하느라 꼬박 1년이 넘도록 새 소식을 전해 들을 다른 선박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p.306 그렇게 참담하게 패퇴하는 경우가 반복되다 보니 모비 딕에 대한 공포는 점점 쌓이고 부풀려졌으며, 급기야 용맹한 고래잡이들의 귀에까지 흰 고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들의 용기마저 뒤흔들기에 이르렀다. 온갖 종류의 터무니없는 소문이 과장되었고, 고래와 사투를 벌인 실화는 더 끔찍하게 각색됐다. p.307 그러니 드넓은 바다를 이리저리 흘러 다지며 몸집을 키우고 한껏 부풀려진 ..

도서 2024.06.14

<모비딕>을 통해 살펴보는 힘의 역학관계

1권 33장부터 36장에서 멜빌의 시선은 작살잡이장, 선실의 식탁, 돛대 꼭대기, 뒤쪽 갑판 등 배의 다양한 장소 및 각 장소에 있는 인생들에 머문다. 에이해브 선장이 있는 뒤쪽 갑판에서부터는 저물녘, 황혼, 첫 번째 야간 당번, 한밤중과 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 사회를 고찰한다. 해당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강자는 낮의 시간을 점유하고 분노를 숨김없이 표현하며, 약자는 밤의 시간으로 내몰리고 웃는 얼굴을 한다는 것이다. 1. 강자1.1. 낮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강자 아침 식사를 마친 이후부터 해가 저물기까지, 에이해브는 끊임없이 거닐며, 자신의 생각에 몰두한다. p.273 그런 데다가 밭도랑처럼 주름진 이마를 눈여겨봤다면 거기에서는 더 이상한 발자국, 쉼 없이 거니는 상념의 발자국..

도서 2024.06.13

<이처럼 사소한 것들> 독서일기 #3 - 슬픔이 안전을 낳다

펄롱은 출생이 고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곳에서 태어나 성장한다. p.15 펄롱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엄마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그 집에 지내며 일할 수 있게 해줬다.p.16 펄롱은 유아기를 주로 미시즈 윌슨 집 부엌에 있는 요람 안에서 보냈고 다음에는 커다란 유아차의 안전띠에 매인 채 수납장 옆, 길쭉한 파란 주전자에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지냈다. 펄롱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커다란 서빙용 접시와 시커먼 레인지―뜨거워! 뜨거워!―그리고 두 가지 색 정사각형 타일로 덮인 반들거리는 부엌 바닥이었다. 파란 주전자며 시커먼 레인지에 손을 뻗을 때마다 옆에서는 뜨거워! 뜨거워! 하고 어린 펄롱을 보호하기 위해 소리쳤을 것이고, 이것은 펄롱의 가..

도서 2024.06.07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속 사소하지 않은 친절들

1. 친절할 용기 펄롱은 친절한 사람이다. p. 56 "틀리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당신은 속이 물러. 그래서 그래. 주머니에 잔돈이라도 생기면 다 나눠주고―"p. 86 "너희 헌금함에 넣을 잔돈 있니?" 예배당 마당에 들어설 때 아일린이 딸들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아니면 너희 아빠가 다 누구 줘버렸나?"p.102 "오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안 부치고 가지고 있었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아저씨는 신사래요." 펄롱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친절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때 괴로움을 느끼며, 일신의 안락함을 등지고서라도 옳다고 믿는 선택을 할 때, 마주할 현실에 대한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p.99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도서 2024.06.06

<논증의 기술>과 <모비딕>과 함께 농담으로 마무리하는 하루

또 가슴이 뛴다. 설레어서라기보다 무리해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하지만 과연 무슨 일을 덜어낼 수 있었을까, 싶다. 숙제로 앤서니 웨스턴의 을 몇 자 읽었는데, 웃기는 농담도 논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여겨졌다. p.25 지구에 사는 것이 고된 일일 수도 있지만, 누구나 지구에 살기만 하면 해마다 한 번씩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무임승차권을 얻게 된다. 이런 관조적이고 해학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의 무게가 다소 가벼워질 수 있겠지. 나만의 농담에 기반한 논증(...이라고 부르기 거창하다면 그저 이를 패러디한 나만의 농담)을 시도해 보자. 지구에 사는 것이 고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천국 소망을 더욱 품을 수 있게 된다.지구에 사는 것이 고된 일일 수도 있지만, 하..

도서 2024.06.03

<이처럼 사소한 것들> 독서일기 - 이야기에 대한 성찰

인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야기를 사랑한다. 이야기는 우리를 갈망한다. 이야기는 언어와 문화를 전승 및 학습하는 중요한 도구이며, 상호 돌봄 및 공동체 유지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우리 삶의 원동력이다. 이야기는 공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말들을 너무도 쉽게 입에 올린다. 테니스장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000씨의 술버릇이 얼마나 고약한지, ***씨 와이프가 얼마나 눈화장을 짙게 하는지, @@@씨의 자녀가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마음 한 켠에서 깊은 공허함을 느꼈던 것 같다. (커서 되돌아보니 그랬던 것 같다는 이야기이고, 과거 십대의 내가 실제로 뒷담화의 현장에서 공허함을 느낄만큼 성숙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음은..

도서 2024.06.02

<모비딕>을 통해 고찰하는 인간의 이중성과 폭력의 문제

1권 34장 ‘선실의 식탁’에는 식사자리에 드러나는 에이해브의 권력이 그려져 있다. 권력의 결과를 이중성과 폭력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1. 인간의 이중성 1.1. 사회화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면성을 지녔다. 사회화 과정 자체가 이중성을 기르는 과정이다. 본능에 충실한 영유아기를 지나고 학령기와 청년기를 보내며 인간은 차츰 분노, 욕구, 기쁨, 슬픔과 좌절을 감추는 법을, 때와 장소, 상황(TPO)에 맞는 가면을 장착하는 법을 배워간다. 1.2. 불안 성격의 이중성이나 정동 및 태도의 일시적인[잦은] 돌변은 사회화 과정에서만이 아닌 불안의 문제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불안은, 개인을 위축시키고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돌변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

도서 2024.05.28

<모비딕>과 각설이 모자

낙심하고 좌절해온 순간에 하늘을 원망하며 기도해 온 것보다 더 놀라운 선물을 안겨주셨다는 간증을 들으며 엉엉 울었다. 울고 또 울던 기억이 나서, 그리고 너무너무 부러워서 많이 울었다. 바라고 바라다가, 그냥 안 주셔도 된다고, 내 인생 주께서 알아서 인도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시라고 일정 부분 체념[맡김? 드림?]한 것 같기도 한데, 저 깊은 저수지에서 끌어올린 듯한 눈물이 또 왈칵왈칵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무언가 크고 놀라운 일을 내 인생에도 보이실 것을 적잖이 기대하고 있었구나, 싶다. 그런데 내가 바라 마지않는다고 생각하고 또 말해온 것이 어떤 것들이며, 그것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을 읽으며, 드는 것이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그런 것인지, 서론..

도서 20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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