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126

버스비와 슬픔들

버스 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하고, 40분 가량의 거리를 늘 걸어서 통학한다는 학생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버스비를 마련하기 힘들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팠다. 카드를 찍으라는 버스 기사님 말씀에 조금 횡설수설 하시며 두세 정거장만 더, 하던 여자분의 버스비를 대신 지불해 드리고 싶었는데, 기사님은 나를 말리시며 여자분을 내리게 하셨다. 삶이 슬프다. 곤고하고 쓰라린 마음들과, 그 마음들을 향한 모든 마음들을, 축복한다. 아이의 귀가길이 너무 멀고 고되지는 않았기를, 세상 모든 아픔들이 위로 받고 치유되는 밤이 되기를, 기도한다.

일상 2024.04.23

모기의 살신성인

방충망에 뚫린 구멍 사이로 모기가 들어왔나보다. 아이가 기겁을 하기에 들여다보니, 초록빛을 띤 모기였다. 물지 않는 종류라며 안심시켜주고는, 어쨌거나 신문으로 탁 내려쳐 잡는 데 성공하고 방에서 나오려는데, 아이가 말한다. 엄마, 수컷 모기는 물지 않는대요. 암컷이 산란기가 오면 피를 빨아먹는 거래요. 응, 그렇지. 아이가 무심코 덧붙인 말에, 나는 크게 놀랐다. 목숨을 바쳐 피를 빨아먹는 모기네. 아이야, 정말로 그렇구나! 나의 기준에서는 흡혈 해충이지만, 나름 새끼를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하는 강인한 엄마인 것이로구나. 안도현님의 시가 떠오른다.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

일상 2024.04.18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애도

발레 학원 오가는 길을 되짚어 찾아보려 한, 퇴근길에 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은 날이 밝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보낼 것은 보내야 한다. 언제까지 찾고 있겠는가. 그러나 생명은 귀걸이 한 짝이 아니다. 언제 적 돌아가신 부모님인데 아직도 기일을 챙기느냐고 책망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망각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기보다는, 차라리 슬픔에 잠겨 평생을 살아가기를 택하자. 함께 애통해하기를 원한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일상 2024.04.16

민들레와 퍼스트 펭귄과 혁신과 감사

금요일 퇴근길, 학교 텃밭에 아무렇게나 자란 민들레를 한 봉지 가득 뽑아 왔다. 몇 번이고 깨끗하게 씻어 양파와 함께, 참깨도 아낌없이 뿌려 무치고, 수육과 함께 저녁 상에 올렸다. 새콤달콤 쌉싸름한 향이 괜찮았다. 그런데,이럴수가! 한 달 가까이 입 안 여기저기 쉬지 않고 생겨나, 심지어 양치할 때마다 선혈을 토해내던 분화구들이 하룻밤 사이 없어졌다. 민들레에 항염과 면역력 증강 효과가 있다더니, 정말 신기했다. 칼륨이 많아 너무 많이 복용하면 신장에 무리가 간다는, 짝꿍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되뇐다. 피아노 레슨 다녀오는 길, 아파트 길가에 노오란 민들레가 보인다. 어디 민들레 뿐이겠는가. 달래, 냉이, 씀바귀, ... 얼마나 많은 선조들의 배앓이와 심지어 목숨의 대가로 우리는 이런 고마운 약초들..

일상 2024.04.13

사색의 중요성

가득 짜여진 일정 가운데 무언가 창의적이고 깊이 있는 생각이 결코 나올 수 없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또 하루를 정말 열심히 살고 제법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나, 아름다운 생각들을 시도할 여력은 없는 상태. 우리에게는 사색의 시간, 비어 있는 시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그렇다. 맨날 도서관에서 엎어져 자던 나를 공부 좀 하라며 흔들어 깨워주던 친구가 떠올랐으나 읽던 책과 독서기록장을 덮고, 침이 한가득 섞여버린 마누카 프로폴리스를 입에 물고서, 잔뜩 땀을 흘려가며 일구어 놓은 상자 텃밭에 정작 내가 바라던 토마토는 심을 수 없었음에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가까스로 사수한 영역에 바질 모종을 속히 심으리라 다짐하며, 새로운 동작이 아닌 새로운 연결이었을 뿐인데 심히 ..

일상 2024.04.03

다섯 가지 ‘화’

#1. 아이의 화 어떤 아이가 학습일지에 쓴 내용이다. “너무 할 게 많아서 화났다.” 반면 나는 동료 선생님과 함께 모둠활동을 순차적으로 안내해가며, 학생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피드백을 제공해가며 여유롭게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학습하느라 바쁘고, 교사는 한가...하다기보다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학습자 중심 수업이라면, “화가 날 지경까지” 바쁘게 만들었던 것은 반성해야 하겠으나, 일단 괜찮은 수업을 진행한 것 같다. #2. 꽃 화 퇴근길에, 작년에는 볼 여유가 없었던, 벚꽃이 눈에 들어왔다. #3. 화,이팅 나야말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퇴근하기가 괴로웠는데, 저녁식사 준비도, 설거지도, 피아노도, 운동도, 온라인 연수 부분 참석도, 시험문제 출제도, 엉성하기 짝이 없으나 일단 조금씩 ..

일상 2024.04.01

예측 가능성에 대한 개똥철학, 혹은 수다

#1. 예측 가능한 상태 엄마 오늘도 발레 갈까 말까 고민 중이에요? 피아노 앞에 앉아 내쉬는 한숨 소리를 듣고 아이가 묻는다.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6시 전후에 귀가하여 식사 준비와 식사를 하고, 7시 10분경부터 약 30분간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발레 학원에 간다는 것, 발레 연습복을 갈아입기 시작해야 할 마지노선에 해당하는 시각이 다가올 때 나의 망설임이 최고조에 달한다는 것, 그래서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안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딸아이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예측 가능성에 대한 짧은 생각들혹은 나의 사고 훈련, 혹은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말들 2.1. 대상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 예측이 가능해진다. - 우리 아이처럼. 2.2. 예측 가능성은 불안을 줄일 수 ..

일상 2024.03.20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요!" 학창시절 아파트 단지를 걸어가다가 만난 전도자가, 교회 다닐 생각 없다며 가던 길을 재촉하던 내 뒤통수에 날린 폭격이었다. 교회가 더 싫어졌었다. (성도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내게 아주 중요한 선생님임에 틀림없다.) 이 일을 떠오르게 하는 일이 있었다. 참 슬프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내 마음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가, 나와 타인과 세상을 향한 분노와 우울감이 아니기를 소망한다. 이 이지러진 모습으로 이 이지러진 세상을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하며, 신 앞에 고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기를 소망한다. 마음과 입술을 지켜주시기를 소망한다.

일상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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